성형외과 의사인 로베르토(안토니오 반데라스, Antonio Banderas)는 심각한 화상을 입은 후 자살한 아내의 죽음 이후에 베라(엘레나 아나야, Elena Anaya)라는 여자를 집안에 감금한 채로 인공적인 실험을 통한 피부 이식을 연구하고 있다.
죽은 아내와 무척 닮은 베라에 대해 아내만큼이나 집착적인 행동을 보이는 로베르토는 실은 아내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은밀한 만남을 가지던 도중에 교통사고로 말미암아 화상을 입은 것임에도 로베르토는 아내의 회복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아내는 어느 날 창문에 반사된 자신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 투신해서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아내의 죽음은 딸 노르마(블랑카 수아레즈, Blanca Suarez)를 심각한 정신적 충격에 빠뜨리게 되고, 그 후로 로베르토는 대부분의 시간을 베라의 피부에 대한 연구와 실험에 매진하며 베라의 존재에도 굉장한 집착을 보이며 살아간다.
도대체 베라는 어떤 이유로 로베르토에게 감금되어 실험 대상으로 살아가게 된 것일까?
사실 로베르토는 그 자신의 출생부터 비밀스러운 사정을 지니고 있다.
로베르토는 자기 집안의 하녀로만 알았던 마릴리아(마리사 파레데스, Marisa Paredes)가 자기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고, 영화의 반전에 일정 부분 이바지하는 인물인 제카(로베르토 알라모, Roberto Alamo)와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지간인데, 로베르토의 아내가 바람이 난 상대가 바로 로베르토의 이부형제(異父兄弟)인 제카인 것이다.
사랑했지만 끝내 자신의 사람으로 남지 못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아내와 닮은 베라에게 향해진 것일까?
영화는 일면 기괴하고 해괴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로베르토와 베라의 관계는 로베르토의 딸 노마와 비센테(얀 코르넷, Jan Cornet)라는 청년 간에 벌어진 과거의 사건과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기괴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에 다소 허망한 복수극으로 마감하게 된다.
영화는 결과가 어떻게 끝나는가보다 그 과정을 어떻게 풀어가는가에 집중되어 있는 퍼즐을 푸는 재미가 있다.
'내가 사는 피부'는 배우자의 외도로 말미암은 사랑의 상실과 출생의 비밀을 다룬 막장 드라마의 요소와 더불어 평이한 생각을 뛰어넘은 반전의 내용을 담은 스릴러, 참담한 심경으로부터 파생된 복수극이 뒤섞인 그야말로 기괴한 영화다.
적지 않은 사람에게 이 영화는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으로 다가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독 특유의 미학적인 화면과 색감이 그 내용의 파장을 더욱 증폭시키지만, 반전 자체가 나에겐 아쉽게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스릴러적인 요소를 가진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많이 본 탓인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리 알아채 버린 시점이 조금 이른 것일 뿐,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입을 막을 만큼 '악!'소리가 날 지경이다.
비센테가 의상실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바닥에 늘어져 있던 실타래가 한 줄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어쨌든 영화는 먹기에 무척이나 꺼려지는 기괴한 재료를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장식해낸 듯한 느낌을 지니고 있다.
사랑과 증오는 등을 대고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기가 사랑했던 아내는 자신을 배신하고 자살로 세상을 떠났고, 애지중지하던 딸은 파티에서 만난 비센테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하게 되는 상황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데, 의식을 차리면서 눈앞에 있는 아버지가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줄 오해하고 정신병원에서 지내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다.
로베르토의 사랑은 결국 온전한 것 없이 파멸로 치닫고 끝이 난 것이다.
로베르토는 비센테를 납치하고 복수의 심정으로 그의 성기를 거세하고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해버린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전신에 걸친 성형수술을 통해 비센테를 자신의 아내처럼 만들어 베라를 창조하고 만다.
감금한 베라의 방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늘 베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로베르토, 그가 보는 인물은 과연 누구인 걸까?
그가 창조해낸 인물은 정신은 남성인 비센테 그대로일 것인데, 겉모습은 자기의 아내와 똑 닮은 여성인 베라다.
그는 베라를 사랑하는 것인가, 아내로 착각하고 사랑하는 것인가.
자기가 사랑했던 딸의 죽음을 불러온 대상의 외모를 바꿔 놓고서 이제는 그 대상에게 욕망을 가지게 된 로베르토.
자신의 실제 정체성인 남성을 외적으로 모두 거세당하고 여성으로 탈바꿈 당하지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베라.인간의 실체적 정체성에 대한 극단적인 대비가 두 인물의 비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결국, 로베르토는 끝내 자기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영화에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비뚤어진 욕망과 광기로 왜곡되기도 한다.
인간의 삶에 깃든 사랑과 증오는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릇된 욕망과 광기로 일그러질 수도 있다.
문제는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기의 욕망과 광기를 사랑으로 오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La piel que habito, The Skin I Live In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
* 사랑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애적 측면과 욕망, 부조리 등에 천착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이야기의 성김이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감독 특유의 강박적일 만큼 독특한 느낌은 여전하다.
** 베라 역을 맡은 엘레나 아나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분장 기술과 그래픽 기술의 혁신이 날마다 이루어지는 영화 현장이라고는 해도 어쩌면 그렇게 작은 체구의 몸매가 아름답게 균형 잡혀 있는(지라고 말하기엔 약간 마른 편인데 글래머!)데다가, 그야말로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뽀얀 피부를 지니고 있는지 놀라웠다.
사람에게는 내면도 중요하지만, 외면이 아예 중요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로베르토가 세월이 흐르면서 복수의 대상에서 욕망과 사랑의 대상으로 베라를 대하게 되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스크린 가득 보이던 엘레나 아나야의 미모, 흰 천에 뿜어진 선혈처럼 강렬하게 기억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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