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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아브르: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없는 자들을 위한 희망의 동화

evol 2012. 1. 27. 20:23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 도시인 르 아브르(Le Havre)의 이곳저곳에서 구두를 닦아 생계를 이어가는 마르셀(앙드레 윌름, Andre Wilms)은 아프리카 가봉(Gabon)에서부터 엄마를 찾아 영국의 런던으로 컨테이너 박스에 숨어 밀항하려다가 운송자의 실수로 르 아브르로 오게 되어 경찰에 발각되자 도망치게 된 이드리사(블론딘 미구엘, Blondin Miguel)와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마르셀은 불법 이민자 신세가 되어 신문에도 기사가 실리고 형사 모네(장-피에르 다루생, Jean-Pierre Darroussin)를 필두로 한 경찰들에게 쫓기는 처지에 놓인 이드리사를 딱하게 여겨 집안에 숨겨주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아내인 아를레티(카티 오우티넨, Kati Outinen)와 함께 가난한 삶을 이어가는 마르셀, 심지어 아내가 치료를 시도할 수도 없는 심각한 병에 걸려있는데도, 이드리사를 런던으로 밀항시키기 위해서 그동안 어렵게 모은 돈을 모두 뱃삯으로 내어놓는다.

그뿐만 아니라, 이드리사를 신고한 마르셀의 집 맞은 편의 이웃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이드리사를 숨겨주는 것에 선뜻 동참한다.

과연 그들이 이드리사를 돕기 위해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영화는 이처럼 이드리사를 쫓는 자들과 이드리사의 '엄마 찾아 밀항하기'를 돕는 사람들의 소동 극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커다란 자극적 긴장을 유발하는 대목도 없고, 무덤덤하게 느껴질 만큼 담백한 연출로, 때로는 웃음과 함께 훈훈함이 담긴 영화다.

오래된 프랑스 영화의 느낌을 갖게 하는 분위기는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게 되면 가슴 속으로 따뜻한 바람이 스며드는 느낌을 준다.

사는 게 그리 녹록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가슴 속에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진 착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아주 오래전에 읽은 어느 동화책에서 읽었을 법한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들의 희망과 행복을 그린 동화가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극적인 전개도 없고, 특수 효과는 물론이고 특별한 미장센도 없이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것처럼 지극히 사실적인 분위기지만, 과연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비현실적인 내용 때문에 형식과 내용의 부조화가 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런 장면은 영화의 시작 지점에 일어나는 무장 경찰의 등장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소년에 불과한 이드리사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것과 동시에 그를 말리는 경찰의 모습이 그것이며, 언론이 이드리사를 알 카에다의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것도 그렇다.

하긴 전반적인 영화의 내용 자체가 어쩌면 그렇게 합리적인 전개라고 보기 어려운 판타지에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관객으로부터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이끌어내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담백하다 못해 건조하게 느껴지는 감독의 연출.

그것은 동화적인 내용이지만 그것이 엄연한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뉴스에서는 난민촌을 갈아엎는 프랑스 정부의 강압적 행태가 나오고, 제노포비아(Xenophobia)에 가까운 외국의 불법이민자들에 대한 시위가 보이는데, 르 아브르의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아프리카 가봉의 소년을 힘을 모아 돕는다니!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려는 의도도 없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한 장면도 없고, 비인간적인 권력의 모습에 부르르 떨며 주먹을 불끈 쥐게 하지도 않지만, 이 삭막하고 우울한 지구 어느 곳에 이런 이야기 하나쯤은 현실화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 같다.

비인간적인 공권력에 맞서는 것이 거창하게 무슨 반체제 운동이 아니라, 사람의 희망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작은 연대라는 것.

그것이 영화가 담고 있는 아주 단순명료한 주제의식이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을 돕는 마르셀을 위해서 붙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구두통을 들고 나선 이드리사, 집요하게 이드리사를 신고해서 경찰에 넘기려는 마르셀의 앞집 남자의 손아귀에서 이드리사를 구해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신분증을 위조해 밀입국한 베트남 사람이다.

끈질기게 이드리사의 뒤를 쫓던 모네 경감은 밀항을 위한 배에 숨어든 이드리사를 발견하지만, 오히려 다른 경찰로부터 숨겨준다.

이런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세상에는 언제부터인가 낙관적 태도와 희망의 전망이 사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착한 사람이기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피해받지 않기 위해서는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 더욱더 살기 힘들어지는 승자독식의 시스템과 빈부격차의 간격이 더 크게 벌어지는 사회를 바꿔야 자기 자신의 삶이 나아진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당한 권력에 맞서면 밥줄을 끊기게 될지도 모르니까 세상을 바꾸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고개를 돌리고 방관자의 자세로 다른 사람의 희생에 무임승차하려는 사람들.

 

그런 사회를 지속하는 것에 내가 동참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 속에 내가 있지 않나 생각해보게 된다.

 

난관을 뚫고 엄마를 찾아 바다를 건너게 된 이드리사, 불치병이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완치된 아를레티의 모습에서 기적을 본다.

기적은 결국, 가난하지만 마음속에 사랑을 품은 사람들이 이뤄내는 희망이 아닐까?!

 

 

 

Le Havre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

 

* 마르셀이 키우는 개 라이카, 왠지 계속 눈길이 가는 사랑스러운 개다.

 

** 유럽의 영화를 볼 때면 종종 드는 생각이지만, 르 아브르 역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어느 골목에선가 구두를 닦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영화를 생각하며 슬그머니 웃음을 짓게 될 것 같다.

 

*** 이드리사의 밀항 자금을 마련하는 것에 큰 공헌을 한 노년의 락커, 정열적인 빨간 가죽 재킷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부르던 노래는 여느 장면에서 흐르던 샹송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여서인지 무척 도드라지는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