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정원과 수영장이 있는 저택, 그 집을 둘러싼 높은 담장 아래에 부모와 세 남매가 살아가고 있다. 자동차를 타고 일하러 오가고 생필품을 사오는 아버지(크리스토스 스테지오글로, Christos Stergioglou)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철저하게 외부 세상과 격리되어 생활하는데, 심지어 아이들에게는 단어의 뜻조차 왜곡해서 가르치며 철두철미한 통제를 하고 있다. 이 기괴한 가족의 이야기는 어처구니없는 그들의 모습에 실소와 함께 끔찍함을 느끼게 된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어느 한 쪽의 송곳니가 빠지기 전까지는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갈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을 귀가 닳듯이 교육받은 아이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장난감의 모양새로 떨어지면 서로 갖겠다고 싸움을 하고, 그 장난감 비행기가 담장 너머로 던져져도 문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도록 철두철미하게 행동을 규제당하도록 길들어 있다. 20대의 나이까지 자랐지만, 세상에 대해서 도무지 무엇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이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이 영화는 한마디로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억압과 통제를 향한 노골적인 풍자극이며 그런 어이없는 상황에 대한 부조리극인 셈이다. 바다를 의자로, 소풍을 건축재로, 좀비는 노란 꽃으로, 전화는 소금으로 여기며 나누는 그들의 대화에서 무엇을 느끼겠는가. 신처럼 군림하는 아버지는 아이들의 잘못에 가차없는 폭력으로 응징은 아이들이 서로 간의 분쟁에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아들(흐리스토스 파살리스, Hristos Passalis)의 성욕 해소를 위해 외부에서 여자인 크리스티나(안나 칼라이치도, Anna Kalaitzidou)를 들였다가 아이들의 통제에 문제가 생기자 남매 사이에 근친상간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가끔씩 밖에 나가 있는 아버지에게 아이들 몰래 전화를 걸어 필요한 물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엄마(미셸 밸리, Michelle Valley)의 존재는 아버지의 어떤 행동에도 그저 순응하는 허깨비 같은 존재일 뿐이고, 아이들은 아버지의 통제와 훈련에 따라 개처럼 엎드려서 개의 소리를 내며 외부의 침입자인 고양이에 대항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의 성욕 해소 대상으로 데려온 크리스티나와 접하게 되면서 큰딸(아겔리키 파푸리아, Aggeliki Papoulia)은 조금씩 바깥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커지게 되고, 크리스티나와의 협박성(!) 거래로 얻은 영화 비디오를 통해 그 호기심은 증폭된다.
차마 웃을 수 없는 이 영화의 장면 장면은 감독이 언급한 대로 권력층의 지도자와 거대 미디어가 국민을 진실로부터 고립시키고, 왜곡된 허위를 진실로 둔갑시키는 것에 대한 풍자와 노골적인 은유를 담고 있다. 권력의 허위 정보 제공에 기계적으로 순응하는 모습은 과연 영화 속의 저 아이들만의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의 처지와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권력에 지속적인 기대를 담은 투표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영화 속 아이들의 한심하고 우스꽝스럽고 서글프기까지 한 모습이 겹쳐 보인다.
영화가 겨냥한 권력에 대한 은유와 풍자의 힘은 분명한 비판적 교훈을 담고 있지만, 내가 오히려 주목한 부분은 권력에 대해 순응하고 순종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도 실현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죽기 전까지는 절대 빠지지 않는 송곳니, 빠져야만 이 고립과 통제의 굴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위협하는 고양이에 대항해서 으르렁거리며 개처럼 짖어대기만 한다고 그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를 향한 권력의 조종에 우리는 맞서 싸울 용기보다는 그저 피하기 위해 짖어대고 있지는 않나?
영화의 어떤 면에서 보자면 미카엘 하네케(
Michael Haneke)나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가 생각나기도 한다. 영화의 형식적 측면은 굉장히 건조하고 카메라가 담는 바깥의 세상은 황량하고 삭막하다. 특히, 인물을 담는 장면에서는 목이 잘려나가는 것은 일쑤이고 화면의 구성도 균형과 조화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파장을 극대화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생각하면서 생각하게 된 것 중 하나는 도대체 아버지의 발상의 근저에 무엇이 있는가이다. 영화상으로 보자면 아버지는 자기의 자식들을 사랑하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징벌할 때에는 손찌검을 서슴지 않지만 그 이면에는 세상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고자 하는 걱정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권력의 지도자로 치환했을 때 어떤 비유가 가능할까?
권력이 생각하는 '걱정'이라는 단어의 뜻과 '보호'의 뜻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다른 세계의 언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리석은 국민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걱정이고 보호인 셈이라는 것이다. 오직 자기만이 모든 것을 지배, 감시하고 관리해야만 권력의 울타리가 계속 그 견고한 철옹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영화에서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모든 생활에 필요한 수단 또한 독점하고 장악하는 것에서도 '독재권력'의 모습을 발견한다.
죽을 때까지 진실의 끄트머리조차 보지 못하고 개처럼 살아갈 수도 있는 우리의 삶이라면? 그런 측면에서 영화의 결말에 섬뜩한 모습으로 웃음 짓는 큰딸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밖으로 나갔으되 그는 과연 밖으로 나간 것일까? 이 역설적이고 비관적이기까지 한 결말은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미간이 찌푸려지는 갑갑함과 답답함을 안겨 준다.
Kynodontas, Dogtooth
감독: 지오르고스 란디모스(Giorgos Lanthimos)
* 성기 노출과 근친상간의 장면 등 심약한 관객에게는 불편한 장면일 수도 있는 요소가 꽤 있다. 그런 장면이 영화의 필수적인 재료로 쓰이는 경우에 대개 그렇듯이 지나고 나면 별로 충격적이지는 않다. 물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가변성이 크긴 하지만......
** 외부로부터 반입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큰딸이 본 영화가 무엇인지 짐작해보는 재미가 있다. 내가 본 바로는 록키(Rocky)와 죠스(Jaws)다. 그리고 부모의 결혼기념일에 두 딸의 공연(정말 웃긴 장면이다) 후에 큰딸이 혼자 추는 춤에 또 다른 영화가 있다. 플래쉬댄스(Flashdance)에서 'Maniac'이라는 노래가 흐르면서 주인공이 몸을 푸는 장면과 마지막에 주제곡인 'Flashdance...What A Feeling'과 함께 심사위원들 앞에서 추는 춤을 큰딸이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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