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언론을 통해 피를 나눈 혈연관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패륜적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접하곤 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금전 문제 따위 등으로 서로 관계를 절연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될 때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피가 섞였다고 저절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허망감과 낭패감이 들게 마련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형제자매간에 벌어지는 살벌하고 잔인한 사건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 요즘, 더 없이 마음이 휑해지곤 한다.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과 커다란 울림을 주는 영화 한 편은 우리의 황량한 가슴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 위로가 되고, 마음과 정신의 때를 씻어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해 주곤 하는데, 바로 이 영화 '심플 라이프'가 그런 영화이다.
홍콩의 유명한 영화 제작자인 로저(유덕화, 劉德華, Andy Lau)는 잦은 출장으로 중국을 다녀오곤 하는데, 다른 가족은 모두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 혼자 지내고 있다. 그런 그의 집에는 4대째 로저의 집안에서 가정부 일을 하며 집을 지키는 아타오(엽덕한, 葉德嫻, Deannie Yip)가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혼자서는 도저히 자신을 건사하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요양원으로 떠난다. 낯선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아타오는 처음엔 힘들어하지만, 차츰 적응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로저는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아타오의 빈자리와 존재감을 새삼 깨닫게 되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정성껏 아타오를 돌보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로저의 기대와는 달리 아타오의 건강은 악화일로로 빠지게 되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예감한 아타오는 오히려 로저를 위로한다.
이 영화는 부유한 집안의 귀한 아들과 그 집안에서 집안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온 하녀와도 같은 가정부의 이야기다. 자그마치 4대에 걸쳐 한집안에서 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온 아타오, 그가 아기 때부터 아들처럼 여기고 돌본 로저의 이야기는 실화다. 물론, 실화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점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가 영화화된다는 것이 어쩌면 역설적으로 안타깝게 생각되기도 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아타오가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익숙하게 장을 봐서 로저에게 밥을 해주는 장면이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로저 집안에서 하녀로 자라온 아타오는 무슨 음식을 하든지 로저가 원하는 대로 입맛에 맞게 차려낼 만큼, 로저를 어릴 적부터 봐 온 터라, 로저가 살아온 지난날의 기억도, 그 기억 속에 남은 사람들과의 추억도 함께 나누는 친숙한 사이다. 하지만 로저와 아타오의 관계는 딱 그렇게 한집안의 도련님과 하녀와의 관계에 자리하고 있는데, 영화는 두 사람의 그러한 위치와 상황을 식탁을 차리는 아타오의 태도와 말없이 음식을 먹는 로저의 모습을 통해서 그려낸다. 아타오는 그 일을 60 여년 간 해왔고 로저는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
평생을 누군가에게 기대며 살아본 적이 없는 아타오는 중풍에 쓰러진 자신이 로저에게 짐이 될까 봐 스스로 집을 떠나 요양원으로 들어가는데, 로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계속 찾아오자 미안하고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고마움과 반가움을 감출 수 없을 만큼 기뻐한다. 요양원은 겉으로는 치료를 하며 회복을 도모하는 곳처럼 보이지만, 사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력이 쇠진하고, 병력이 오래되어 치료가 힘든 상태의 사람들이어서,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씩 주검으로 사라지는 어둡고 쓸쓸한 공간이다.
그나마 아타오에게는 로저가 찾아와 주지만, 그곳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식이 있어도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이 허다하다. 아타오는 다른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을 홀로 두지 않고 돌봐주는 로저가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한편 로저는 언제나 자신의 빈집을 지키며 음식을 해주고 집안일을 해주던 아타오가 병석에 눕게 되자, 지금껏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타오의 존재가 자신에게 어떠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혼자인 삶을 살던 자신에게 아타오는 엄마의 역할과 친구의 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는 것, 지난 세월 동안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는 동안 아타오는 단순하게 자신을 일로 대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점점 깊어가는 아타오의 병환, 로저는 자기가 제작한 영화 시사회에 아타오와 함께 자리한다. 걷는 것조차 힘에 겨워 휠체어를 탄 아타오와 함께 거리를 걸으면서 로저는 생이 사그라지는 아타오의 모습을 마음속 깊은 곳에 담는다. 검은 기운이 드리운 얼굴, 더 이상 펴지지 않는 허리,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다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로저는 아타오에게 가슴 깊이 사랑의 고마움을 뜨겁게 전한다.
홍콩 영화계의 거장 중 한 사람인 허안화 감독의 따뜻하고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듯한 차분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자칫 무겁게만 진행될 영화의 분위기 안에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 같은 웃음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의 모습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차곡차곡 그들의 감정을 쌓아가며, 결말의 피할 수 없는 뜨거운 감동으로 이끄는 솜씨가 훌륭하다.
로저 역을 맡은 유덕화의 자연스럽고 담백한 느낌의 연기 또한 훌륭하다. 그를 홍콩 누아르나 액션 장르의 영화에서만 만났던 사람들에게는 유덕화가 이렇게 표정으로 연기하고, 내면의 감정을 응집해서 꺼내어 놓는 연기자였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 배우로서 그의 행보가 앞으로 또 다른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확인하며 기대감을 갖게 한다.
예순을 훌쩍 넘긴 홍콩 영화계의 배우 엽덕한의 모습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생생한 모습이 담겨 있고, 특별히 눈물 흘리는 장면도 없이 관객을 감동으로 울게 하는 연기력에는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을 느낄 수 있다. 로저와 아타오의 모습은 사람간의 관계에 혈연관계만이 우월한 것이 아님을,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실재적 관계가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세상은 계속 더 각박해지며 사람들의 관계도 점점 얕고 거칠어지는 오늘, 혈연을 뛰어넘는 사람과 사람의 깊고 따뜻한 인연과 정,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보면서, 무심하고 무감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일이 무척 필요한 것 같다. 그런 자기 성찰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쓸쓸히 살아가며 고독감과 서글픔 속에서 늙어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桃姐, A Simple Life
감독: 허안화(許鞍華, Ann Hui)
*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미리 휴지나 손수건을 준비하는 게 좋을 영화다.
모처럼 훈훈한 마음으로 울 수 있을 테니까.
** 영화감독 서극(徐克), 배우 홍금보(洪金寶), 황추생(黃秋生) 등이 우정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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