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 Javier Bardem)은 조울증에 알콜과 쾌락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내 마람브라(마리셀 알바레즈, Maricel Alvarez)와 어린 두 남매가 있는 가난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이다.
그는 중국계 사람들을 인력시장에 팔고,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짝퉁 가방을 파는 일에 관여하여 살아가는 브로커로 생계를 이어가며, 죽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능력이 있어서 이따금 유가족에게 고인과의 대화를 해주고 대가를 받기도 한다.
한편, 그는 전립선암이 다른 장기에도 퍼져서 얼마 살지 못하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니는 대신, 악착같이 돈을 끌어모아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물려주고자 갖은 애를 다 쓴다.
그는 정작 아버지의 얼굴조차 대면해보지 못했지만 그런 이유로 더욱더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집착한다.
하지만, 그에게 점점 드리우는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며 지난날에 대한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엘 라발 지역이다.
그곳은 1960년대 스페인 내전 당시에 프랑코 정권이 카탈루냐 문화의 파괴를 위해 카탈루냐어의 사용을 금지하며, 카스티야 지역의 사람을 포함해서 스페인의 다른 지역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을 겪었고, 이후에는 중국,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의 아시아 지역과 루마니아, 집시 등의 동유럽을 포함해서 세네갈 등의 아프리카인들이 이주하며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영화의 장면에서도 나오지만, 가우디의 건축물로 유명한 바르셀로나는 언뜻 떠올리면 아름답고 열정을 간직한 도시다.
그렇지만, 하층민으로서 살아가는 이주민들에게도 그런 열정의 아름다움을 누릴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포획된 짐승처럼 감금된 채 노동력을 제공하다가 사고로 죽은 이주민들의 시체가, 태양이 작열하는 바르셀로나의 해안으로 떠밀려 오는 그 살풍경은 감독의 전작 '바벨(Babel)'의 화두였던 인류의 전 세계적인 고난과 재앙을 다시금 말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의 것이다.
욱스발에게 집중하며 이어지는 내용은 영화의 포스터에서처럼 욱스발 개인을 제외하고는 아웃포커싱된다.
그 부분에서 느껴지는 것은 영화에서 보여준 세상의 현실의 문제를 희석해버린다는 것이다.
현실의 구체성을 흐릿한 뒷 배경으로 삼는 것에 대해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과 아쉬움을 가지게 되는 부분이다.
고된 인생들의 군상과 인종과 계급계층의 문제를 아우르며 생의 소멸로 치닫는 죽음을 다루는 이야기는 결국 요즘의 이슈처럼 상위 1%를 제외한 99%의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이며, 또한 여기와 저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의 이야기다.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고향과 가족을 떠난 사람들이 숨이 턱턱 막히는 현실에 질식해서 죽어간다.
희망찬 내일을 향해서 오늘의 절망을 견디는 사람들이 거대한 세상의 파도에 떠밀려 차라리 편안하게 수장되지도 못한다.
이 아름다운 세상?!
영화는 아버지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무엇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무력한 아버지의 비참함이 담겨 있다.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 혹은 못하는 오늘날의 현실처럼 와해한 가족의 틀을 아버지는 복구하지 못한다.
삶에서 이탈해서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 어디 비단 욱스발의 문제에 국한된 문제일까?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영화에서 얻게 되는 것은 과연 희망일까? 절망일까?
낙관과 비관, 긍정과 부정의 문제를 과연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범주의 문제일까?
그렇기에 살아간다는 것, 삶이라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울 수는 있는 것인지 고된 질문을 던져 준다.
우리가 착하고 바르게 살아가고자 마음먹는다고 세상이 나의 그런 의지를 받아들여 주는 곳이긴 한가? 하는 의문을 안겨 준다.
스러져가는 욱스발의 모습에서 전해지는 그 두려움과 담담함에서 비참한 최후가 차마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너무 힘겹다.
욱스발 역할을 맡은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배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배우가 영화를 어떻게 책임지고 이끄는가, 영화에 어떤 힘을 불어넣는가를 명징하게 설명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온갖 고통과 고뇌와 고독함과 고단함과 고난을 섞어서 얼굴에 뿌린다면 바로 그게 욱스발의 얼굴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게다가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느리지 않게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나의 얼굴이 찌푸려져 있는 것을 깨달으며 표정을 펴기를 반복할 정도였다.
하비에르 바르뎀에게 깃든 그 그늘과 어둠의 정서는 보는 사람의 체온을 떨어뜨릴 만한 기를 뿜어낸다.
이건 아마도 개인적인 느낌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이 체험한 증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만난 악역 중 가장 끔찍하고 매정한 캐릭터'였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로부터 눈동자의 초점에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죽음을 향해가는 '비우티풀'의 욱스발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자신의 지나온 과거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하기는 하지만, 그 시점에서는 이미 아무론 소용이 없어진 후다.
자기 가족의 삶을 위해 타인의 삶을 유린하며 결국 죽음으로 내몰고 마는 욱스발의 모습에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종종 하는 생각이지만 한 가정의 좋은 아버지가 반드시 한 사회의 좋은 구성원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욱스발은 그의 가족을 지키려는 모습에서 가부장적인 태도조차 연민을 받지만, 욱스발이 팔아넘기고 그들의 처지가 딱해서 산 난로(가장 싼 가격!) 때문에 죽어간 중국인이나 거리에서 사냥 당하듯 경찰에 잡혀간 세네갈인의 고통은 외면당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한 개인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비정하고 가혹한 공간에서 얼마나 부딪히고 찢기며 견뎌야 하는 것인지......
영어 'Beautiful'의 스펠링을 잘못 쓴 비우티풀(Biutiful).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된다고 딸에게 말하며 욱스발이 쓴 단어.
삶도 그렇게 보이는 대로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그대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으랴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Biutiful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alez Inarritu)
* 영화 대사 중에서 아이들은 우주 속에서 자라난다는 말이 있었다.
그에 대해 "하지만, 우주는 집세를 내주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다.
** 페넬로레 크루즈의 남편으로서 하비에르 바르뎀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적어도 영화에서처럼 목을 조르며 몰아세우는 그런 것은 아니겠지?
*** 하비에르 바르뎀의 차기작이 자그마치 테렌스 맬릭 감독의 작품이란다.
세상에!
그 감독과 그 배우의 화합물은 어떤 것인지 벌써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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