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를 거쳐 방송국의 아나운서로 일하는 상협(정희태)은 조금의 실수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며, 외출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소지품을 나란히 정렬시켜서 반듯하게 정리해야 하는 강박증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그에게는 어릴 적의 화재 사고로 말미암아 몸에 보기에도 끔찍한 흉터가 있다.
자신의 그런 모습까지 사랑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자기와 결혼한 아내에게 자존심을 내세우며 냉랭하고 건조하게 대한다.
엄하게 가르치는 어머니 아래에서 과묵하고 내성적으로 자란 선희(박소연)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소심하다.
감정 자체가 메말라서인지 남편 상협이 직장의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고 있는 사실을 대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고 만다.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선희의 공간에는 소리 없이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꽉 채워져 있다.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남편의 자세와 자신의 태도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서로의 관계는 점점 어긋나고 있다.
상처는 고통이 남긴 흔적이다.
그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뿐더러 기억이 배어 있어 때때로 지난 시간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재연되곤 한다.
흉터, 고통의 시간이 지나간 곳에 자리 잡은 상처의 잔해는 과연 어떻게 해야 지워질 수 있는 것일까.
그저 버티고 대충 수습하거나 덮어버려도 이내 그 흉터는 제자리로 돌아오곤 하는데 말이다.
흉터에 배인 아픔의 기억은 어쩌면 지워지는 게 아니라 잊혀지는 것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선희가 가진 어린 시절, 뒷걸음질치고 싶은 상황에서 자기를 매몰차게 앞으로 내몰던 어머니로부터의 상처.
상협의 어린 시절, 끔찍한 사고를 당해서 한여름에도 긴 팔을 입고 맨 위의 단추까지 채워야 했던 아픔의 상처.
상협이 선희에게 다가가면 선희가 밀어내고, 선희가 상협에게 다가서면 상협이 밀어낸다.
올해 9월에 열린 산 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San Sebasti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 초청된 작품이다.
소설가 한강의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 중에서 '아기 부처'라는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시간이 무엇인지 모자란 느낌도 주지만, 주제에 집중하며 군더더기 없이 전개되어 마무리된다.
반면에 짧은 상영시간과 구성의 단순함에서 오는 공복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꿈과 현실 사이, 상상과 실제 사이를 오가는 표현 방법이 과연 글로 표현된 질량을 얼마만큼 담아냈는지는 모르겠다.
미루어 짐작해야 알 수 있는 여백은 대중들에게는 종종 불친절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데, 선희가 살아가는 태도는 왜 그리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것인지 또, 상협은 왜 그렇게 강박적으로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지에 대해 좀 더 담는 게 좋지 않았을까?
선희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소심했고, 상협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에 소심했다.
사람의 관계에서 소심함은 게으름일 수 있고 게으름은 관계를 파탄으로 이끈다.
영화의 영어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I believed I Could love him.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삶은 믿음 혹은 생각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로 빚어지는 삶은 더더욱 그렇다.
Scars
감독: 임우성
* 선희 역의 박소연은 가수 박혜경의 동생이라고 한다.
굉장히 정적인 연기를 펼쳐야 하는 역할이라서 힘들었을 텐데 인상적으로 남는다.
** 영화에서 보이는 몇몇 장소는 무척이나 낯선 느낌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안겨 준다.
그런 장소를 찾아내는 과정이 영화에 얼마나 큰 비중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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