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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합니다: 인생의 황혼, 거기에도 삶과 사랑은 있다

evol 2011. 5. 12. 02:32

 

 

" 송이뿐이야. 송이쁜이 아니라, 송이뿐이다 할 때 그 송이뿐 "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에 우유배달을 하는 김만석(이순재)은 몇 해 전에 아내를 여의고 살아가고 있다.

손수레에 폐지를 모아서 고물상에 파는 송씨(=송이뿐, 윤소정)는 오래전에 시골에서 올라와서 결혼에 실패한 뒤 홀로 지내고 있다.

마을의 주차장을 관리하는 장군봉(송재호)은 자식들이 모두 출가한 후에 치매에 걸린 아내 순이(김수미)를 돌보며 살고 있다.

만석과 송씨는 어느 새벽의 마을 언덕에서 만나게 되면서부터 따뜻한 사랑의 겨울을 시작하게 된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만화가 강풀 원작의 웹툰을 원본으로 삼고 있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만화책과 무대에 올려진 연극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서 영화화하는 데에 적지 않은 부담이 있었을 텐데, 결과물은 원작에 대해 충실한 길을 걸으며 만들어졌고 커다란 흠이 없이 감동을 이전시켰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각본이 특별한 군더더기 없이 잘 압축되었고, 감정을 쥐어짜 내려는 억지 연출을 피한 것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노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에 숨결을 불어넣은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특히 김만석 역의 이순재는 원작의 주인공을 그대로 실사로 옮겨 놓은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 매체의 내용 중에 가장 많이 다뤄지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랑'일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다층적인 사랑을 그려내는 문화예술적인 작품들은 많지 않다.

특히나 노인들의 삶과 사랑을 다루는 것에는 더더욱 인색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한 사회의 문화적인 내용의 구조는 곧 그 사회가 얼마나 소외시키는 계층이 없는 사회인가의 반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TV 드라마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노인들의 삶과 사랑을 다루는 시도가 거의 없다.

온통 젊은이들만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심지어 부유층을 다루지 않는 경우도 드문 지경이다.

사회의 구체적인 생활의 보장에서도 소외되어 있을뿐더러 문화적인 주제에서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강풀 원작의 만화는 한국 대중문화의 한 지평을 연 작품이며, 그것을 영화화해서 대중들에게

노인의 삶과 사랑 더 나아가 우리가 그동안 보려고 하지 않았던 노인들의 문제, 가족의 문제에까지 시선을 주게끔 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소중한 가치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다시 부부가 되었다. 가족이었는데......"

 

노인이 전면에 등장하는 영화지만 분명히 사랑을 다루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랑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 내리는 눈이라고 해도 봄이 되면 녹는 것처럼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만석의 오토바이가 튕겨낸 돌멩이에 송씨가 맞지 않았더라면 만석과 송씨는 여전히 모르는 채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유한성과 우연성이 사랑의 본질 중의 요소들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그 우연한 만남은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의 순간에까지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 것이며, 다시 볼 수 없을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랑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새겨지게 만들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송씨를 위해 그림으로 말을 전하는 만석, 그런 만석에게 고마움을 전하고자 글을 배우는 송씨, 더럽혀진 아내의 몸을 손수 씻어주는 군봉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참으로 깊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현실의 공간이라기보다는 동화적인 공간으로 여겨질 만큼 따뜻하고 예쁘게 담긴 그 골목과 가로등 그리고 송씨의 집 창문.

그 안의 공간은 이 세상 어느 방보다도 아름답고 따뜻하며 포근한 사랑이 배어 있을 것만 같은 곳이다.

만석으로부터 들은 '당신'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의 깊이와 그래서 택한 '그대'라는 단어에 깃든 뜻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보는 과정은 노인으로부터 전해듣는 격언이었고, 머리핀과 장갑과 수북이 얹은 밥과 소복이 모은 우유갑은 사랑스럽고 소중한 보물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모아 아내에게 보여준 후에 함께 세상을 떠난 군봉과 순이의 모습은 무척 안타깝고 슬픈 선택이었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읽고 반성해야 할 기회를 주고 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새벽 하늘로 솟아오르는 해도, 저녁 하늘로 저무는 해도 모두 해이듯이 황혼의 모습으로 보여준 그들의 사랑도 분명히 사랑이다.

아니 더 많은 시간의 더께에서 오는 성찰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소중함에서 오는 진솔함이 담긴 귀한 사랑일 것이다.

 

 

 

I Love You

감독: 추창민

 

*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나이가 들지 않는 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군봉에게 글을 배우는 송씨의 모습을 보면서 "네놈은 욕을 안 해서 인기 폭발이냐?"라고 역정을 내는 만석이 참 귀여웠다.

하긴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늙는다는 것이 슬픈 것은 겉은 늙는데 마음은 그대로여서 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

노인이 되어도 마음에 있는 것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 조연으로 출연한 송지효, 오달수, 이상훈, 이문식, 이준혁 등의 연기도 영화에 활력을 넣는 요소였다.

특히 '애니멀 타운'에서 파격적인 역할을 연기하던 이준혁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고 꽤 웃었다.

착한 손녀로 나온 송지효도 퍽 사랑스러운 캐릭터였고, 오달수와 이문식의 조화는 그야말로 약방의 감초 그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