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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계절: 혼자인 존재의 서글픈 외로움, 더 외롭게 만드는 잔인한 연민

evol 2011. 5. 13. 23:31

 

 

심리치료사인 제리(Ruth Sheen, 루쓰 쉰)와 지질학자인 톰(Jim Broadbent, 짐 브로드벤트)은 일상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집안일을 해나가며, 주말이면 농장에 가서 밭을 가꾸며 가끔 지인들을 초대해서 시간을 보내는 금실 좋은 부부다. 비가 내리는 농장의 작은 오두막에서 함께 차를 마시는 부부의 모습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평안하게 다져져 있다는 걸 보여준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변호사이며 착한 아들 조(Oliver Maltman, 올리버 몰트맨)와도 잘 어울리는 행복한 가족 관계를 맺고 있다.

 

제리의 직장 동료이자 오랜 세월 동안 가까이 지내온 메리(Lesley Manville, 레슬리 맨빌)는 수다스럽고, 남의 생각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먼저 행동하고 말하는 타인에게 다소 버거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결혼에 실패한 후에 혼자 지내고 있지만, 아직도 자기의 날씬한 몸매에 자신감을 갖고 있고 옷도 화려하게 입으며 자신을 꾸민다. 바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감의 시선을 던지기도 하지만, 뚱뚱한 켄(Peter Wight, 피터 와이트)의 고백에는 기겁하며 거절하고 오히려 제리와 톰의 아들인 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찌 보면 철없는 그래서 외로운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다.

 

켄은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지만, 조만간 은퇴하게 될 이후의 삶을 걱정하고 있으며 이혼한 후부터는 과식과 과음으로 체중이 몹시 불어난 뚱뚱한 몸을 가지고 있고 외로움과 우울한 인생의 기운 탓에 힘들어하고 있다. 메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한 후에는 연락을 끊는다. 아내의 죽음으로 홀로 된 로니(David Bradley, 데이비드 브래들리), 엄마의 장례식에도 늦고 손님들에게도 무례히 구는 말썽꾸러기 칼(Martin Savage, 마틴 세비지), 그리고 발랄한 조의 여자친구 케이티(Karina Fernandez, 카리나 페르난데즈) 등이 등장한다.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어느 '다른 한해'를 통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비유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따스한 봄, 활기차고 풍성한 여름, 결실이 있지만 조금씩 서늘해지는 가을 그리고 차가운 소멸의 겨울. 제리와 톰 부부가 영화의 줄기를 이끌고 있지만, 감독이 혹은 관객이 또는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은 메리다. 자기는 행복하다고 부족한 게 없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속에는 깊고 짙은 외로움이 배어 있고 끊임없이 사람과의 사랑과 정에 목말라하고 있으며, '가족' 같은 친구의 관계에서 즐거워했지만 결국 가족 '같은' 관계였기에 가족이 될 수 없음에 슬퍼하는 메리. 그래서 더더욱 상실감과 소외감에 휩싸인 채 극심한 외로움에 살아가야 할......

 

얼핏 보면 제리와 톰은 친절하고 상냥하며 따뜻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은 메리나 켄의 삶을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 곳까지 신경을 써주고 도와주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주변 사람들을 자기들의 삶에 부담이 되지 않는 거리에 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동정과 연민을 보낼 뿐이다. 그 연민이 그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소외감과 쓰라린 상처를 주는지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욕할 수는 없다. 제리와 톰 그리고 메리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여기에서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벽이자 울타리인 경계를 긋고 있는 단위이다. 제리는 자기의 직업에서처럼 일상에서도 말을 들어주지만 구체적인 해법과 답을 주려는 시도와 노력은 하지 않는다. 메리에게 연민을 보내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가 그들의 한계인 것이며 메리의 삶을 책임질 필요와 이유와 고민을 갖진 않는다. 결국 메리는 자기가 지닌 슬픔과 외로움과 어려움을 제리와 톰의 가족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치유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온화해보이는 제리와 톰의 가족, 가정이 보여주는 그 잔인한(할 수밖에 없는) 타인에 대한 연민의 냉혹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메리는 이제껏 자기 인생이 외롭고 불행한 것에 대해 다른 이의 탓을 하며 지내왔다. 펍(Pub)에서 처음 본 멋진 외모의 사람에게는 관심을 주면서도 어쩌면 진심을 담은 별로인 외모의 사람들은 외면했을 것이다. 딱히 갈 곳도 없으면서 자유의 상징으로 구입한 자동차의 배기량이 몇 cc인가는 모르고 그저 빨간색의 날렵한 외관만 본다. 행복이란 것은 평안한 일상에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것에 행복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자기 주변에 사람이 언제든지 있어줄 것이라고 착각했을 테고 결국 쓰라리고 처절함을 맛보며 혼자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깨닫는다는 것에는 아픔이 깃들어 있다. 자기의 삶의 적나라한 상황을 날카롭게 마주했을 때의 그 섬뜩함과 민망함과 서글픔은 금세 벗어날 수 없는 불편한 식탁과도 같다. 메리가 차마 그 민망한 식탁을 벗어날 수 없던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의 식탁에는 아무도 함께 앉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상황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언뜻 보이지 않는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감독의 시선은 참으로 아프게 다가왔다. '아, 저렇게까지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현실에 담긴 본질의 문제를 그려내다니......'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누구나 경험했을법한 그런 보편타당한 진실을 꺼낼 때의 그 당혹스러움을 적지 않은 관객들이 공감하지 않았을까?

 

누구에게나 주어진 같은 시간이 흐르는 세월이지만 서로 다른 방식과 다른 생각으로 살아갈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한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는 만남과 헤어짐, 낯섦과 익숙함, 사랑과 증오, 관심과 무관심, 평안함과 불안함이 공존한다. 계절이 바뀌는 그 세월의 틈바구니에서 사람들은 관계의 변화무쌍함에서 오는 어색함과 영원하지 않은 시간을 느낄 것이다. 언제나 봄이고 여름일 수 없지만, 언제고 겨울의 한가운데에 놓인 것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 한 타인에게 가진 관심과 기대와 사랑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채 관계의 소원함과 단절을 가져올 것이다.

 

 

 

영화에서는 행복한 사람들 곁에 있는다고 해서 불행한 사람도 덩달아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행복한 제리와 톰이 불행한 메리를 좀 더 따뜻하게 껴안을 수는 없는 것인가. 꽃과 풀과 채소들은 돌보면서도 사람인 메리에게 더 배려심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제리와 톰에게서 우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동시에 또한 우리의 모습인 메리에게 겨울을 벗어나서 새로운 봄이 오는 다른 해를 맞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자연의 사계절은 겨울 뒤에 봄이 오겠지만, 사람에게까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자연의 흐름과 사람의 삶을 대비하며 보여준 영화는 봄으로 시작해서 겨울에 마무리된다. 자연은 다시 봄의 따뜻한 바람이 불겠고 사람들에게도 다시 여전한 인생의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일상은 겨울에 정지된 춥고 외로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싱그럽고 화사한 봄의 날을 맞이할 수도 있다. 어떤 계절을 맞이할 것인지는 분명 자기 자신 스스로의 몫이다. 우리를 관통하고 지나는 세월은 그저 우리를 훑고 지날 뿐, 그 세월을 채워나가는 내용은 우리가 가꿔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Another Year

감독: 마이크 리(Mike Leigh)

 

 메리 역을 맡은 레슬리 맨빌의 연기를 포함해서 모든 배우가 각자의 역을 훌륭히 소화해낸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나이가 꽤 든 역할이라서 얼마 전에 본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비교하게 되었다. 연기력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와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정이라는 것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더욱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어쩌면 그런 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에서만 생각하거나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만 찾을 수 있게 된 허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밀히 말해서 내가 느끼는 적잖은 사람들의 관계, 우리 사회의 단편적인 모습은 '세상의 모든 계절'의 것이 더 사실적이지 않을까?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초췌하고 서글픈 메리의 모습에서 눈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었나 보다.

 

** 자꾸 메리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참으로 감정이입이 많이 되게 만드는 캐릭터였다. 한동안 나의 생각 속에서 많은 질문과 염려를 던져줄 것 같다. 아, 인생이란 게 결국 혼자이긴 하지만, 저렇게 철저히 혼자서 삶을 살아야 하는 메리가 너무나도 안쓰럽다. 나는 어떤 계절을, 어떤 세월을 지나고 있을까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