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아내와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탄탄한 회사의 경영자인 월터 블랙(멜 깁슨, Mel Gibson)은 안팎으로 부러울 것 없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에게 찾아온 우울증으로 말미암아 무기력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변모하고 만다.
아내와 자식들로부터도 외면을 받고, 회사에서도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는 급기야 극단적인 선택에 다다르기도 하지만, 그 순간 손에 끼는 장갑 인형인 '비버'와 마주하게 되면서 무엇엔가 홀린 듯이 그 비버 인형을 왼손에 끼고 대화를 시작한다.
마치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월터의 모습에서 정신병적인 분열 상태가 되는 게 아닌지 잠시 생각하기도 했지만, 월터는 비버를 자기의 분신 혹은 또 다른 자아로 인식하며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억제되고 감춰져 있던 자신과의 대화를 하게 된다.
그런 일련의 행동은 가족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일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월터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아내와의 관계와 자식들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하게 되고, 일터에서도 다시 열정적인 자세를 가지게 된다.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서 조디 포스터(Jodie Foster)의 세 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우울증을 심각하게 앓고 있는 한 중년 남자의 고통과 극복 과정을 통해서, 사람의 삶에 깃든 압박감이 주는 고됨과 삶의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의 자기 역할만이 있는 것이 아니듯이, 한 사람에게 덧씌워진 여러 개의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잘 받아들이고 그 모습에 걸맞은 위상으로 정돈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성찰하는 물음도 던지고 있다.
월터에게 비버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유쾌하고 밝은 느낌의 가족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는 우울증에서 겨우 빠져나온 월터와 아내인 메레디스(조디 포스터)가 갈등을 빚기 시작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된다.
더불어 비버 인형을 손에 낀 아버지 월터와 목공 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작은아들 헨리(라일리 토마스 스튜어트, Riley Thomas Stewart)와는 달리, 자기와 아버지의 닮은 점을 일일이 적어나가던 큰아들 포터(안톤 옐친, Anton Yelchin)는 아버지와 닮은 점이 많은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증오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메레디스가 월터와 다시 갈등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잠시 동안 우울증에서 벗어나 밝은 모습을 보이는 월터의 모습이, 월터의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비버 인형에게 심각할 정도로 의존되어있는 모습이기에 오히려 그전보다 더욱 절망하게 된 탓이다.
그것은 월터의 손에 있는 비버의 영향으로 월터는 예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지만, 비버가 아닌 월터 자신이길 바란 것이다.
메레디스가 진심으로 바랐던 것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긴 해도 비버로부터 나온 모습이 아닌, 스스로 극복한 월터였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무기력함에 빠져있는 자신의 그릇된 모습에 맞서는 태도로 극복하기보다는 비버라는 대리의 대상 뒤로 숨어버린 월터의 모습이 제아무리 표면적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나서 가족들과의 사이도 회복되고, 사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피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으며, 언제까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묻어둘 수는 없는 것이다.
'행복한 척하는 게 미친 것'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불행한 자신을 가둔 채 인형을 내세워서 살아가는 게 행복은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행복이라는 정의는 모든 이가 다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에 사람들은 누구나 상처받지 않는 인생을 바라지만, 살아가는 동안 좌절에 빠질 만큼 커다란 상처가 없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긁히고, 베이고, 패인 상처는 숨긴 채로 밝게 웃으며 환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그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결핍되고,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허세와 허영과 허풍으로 포장한다고 해서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사람의 인생이 보잘것없고 비참해지는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직시하고,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모자란 것을 채우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며 변화하고 발전하려는 노력은 뒤로 한 채로, 궁핍하고 빈약한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숨기고, 포장하며 사상누각 같은 헛된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가식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비버 인형을 앞세워 그 뒤로 숨어서 밝은 모습으로 변모했다고 해서 그 모습이 월터의 모든 문제를 극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가면이 아닌 진실함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최소한 행복하진 못해도 불행하지는 않은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행복이란 완전한 의미로서 느끼는 게 아니라, 불행하지 않은 면이 적다는 불완전한 의미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완전해서 느끼는 게 행복이 아니고,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잘 이해하고 채워가며 살아가는 느낌 말이다.
예전에는 아버지를 닮고 싶어했지만, 파괴되어가는 모습의 아버지를 보며 외면과 증오의 마음을 키우던 포터의 마음이 변화해가는 과정에서도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죽은 오빠에 대한 기억을 억지로 지운듯이 살아가며 고통을 잊은 척하는 노아(제니퍼 로렌스, Jennifer Lawrence)의 모습에도 '완전함'을 갈구하는 행복에 대한 그릇된 지향이 엿보였다.
앞서 말했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살아가는 일은 드물 것이다.
우리는 아주 여러 가지의 역할을 맡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누군가의 부모로서, 누군가의 형제자매로서, 누군가의 친구로서, 누군가의 동료로서 등의 역할을 맡고 살아가는 속에서 어느 순간, 혹은 어떤 영향으로 말미암아 정작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고 '사는 대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
영화는 바로 이러한 현상이 미미하든 심각하든 적지 않은 사람이 겪고 있고,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극의 전반과 후반이 다소 작위적인 설정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너무 쉬운 구성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하고, 결말로 향하는 과정에 놓인 등장인물들이 각자 합일점으로 모여지는 부분에서도 지나치게 편의성에 의한 연출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월터 역의 멜 깁슨을 선두로 해서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력이 그러한 단점을 상쇄시킬 만큼 적절하고 유효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시종일관 각 시점과 지점에 맞는 적확한 연기를 펼친 멜 깁슨의 연기는 상당히 좋았다.
마치 자기 몸에 이식된 장기처럼 자신을 지배하던 비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만, 진정으로 자신의 삶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다고 판단하기까지, 월터가 느끼고 겪었을 외로움과 당혹감과 절망감의 무게를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결코 쉽지 않았을, 그의 변화와 극복에 대한 노력과 의지로 마침내 지난 시간의 악습과 게으름을 절연해냈을 때, 그에게는 사라지고 잃어버린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살던 대로 살며,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채로 게으름을 피우면서,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죄가 아닐까?
비록 실패했고, 좌절했으며, 주저앉기도 했지만, 스스로 노력으로 고통을 극복한 월터의 용기와 의지,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The Beaver
감독: 조디 포스터
* 비버의 의미, 참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를 던져준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 몸에 밴 잘못된 습관, 또는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며 대신 움직여주길 바라는 대리인 같은 느낌도 든다.
깨달았을 때 빨리 버려야만 떼어버릴 수 있을 테고,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봐야 저절로 떨어지진 않는데 말이다.
그런 걸 보면, 초반에 그렇게 잠만 자던 월터의 모습에서 보이는 게으름, 그 게으름은 사람을 참 한심하고 볼품없게 만든다.
**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다 잘될 거야."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영화였다.
막연한 희망과 바람은 세월을 갉아먹는 튼튼한 이빨의 괴물과도 같다!
비버라는 동물의 선택, 참 적절하고 뛰어난 비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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