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감동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감동을 말하고, 많은 사람이 감동받길 원하며, 누구든지 감동의 주인공이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
TV 속에서도, 무대에서도, 스크린에서도 사람들은 감동에 흠뻑 빠져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세상이, 삶이 너무나도 감동적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옥문이 열려버린 것 같은 세상의 문제를 외면한 채, 억지로 감동을 찾는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위안이 될까?
멕시코 출신의 불법체류자 카를로스(데미안 비쉬어, Demian Bichir)는 정원을 가꾸고 손질하는 일용직 노동자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인 아들 루이스(호세 줄리안, Jose Julian)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다.
일어나자마자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로 일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소파에 그대로 쓰러져 잠드는 일상을 살아가는 카를로스의 삶은 마치 어느 정물화 속의 인물처럼 꼼짝없이 그림 안에 갇혀버린 듯한 판에 박힌 시간의 반복일 뿐이다.
이런 내용의 영화를 접할 때 염려되는 점은 특히, 하층 계급의 사람이 살아가는 어렵고 고된 일상을 보며 '아, 나는 저런 사람의 삶보다는 낫구나!' 하는 자위나, '에휴, 참 불쌍하게 살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구나."따위의 연민의 시선이다.
아무리 근면 성실하게 노력해도 결코 바꾸기 쉽지 않은 구조적인 모순은 뒤로하고, 세상이 아무리 삶을 기만하고 속일지라도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근거 없는 타협적 위로와 대책 없는 일회성 동정을 감동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영화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민자'의 삶이 아니라, 불법체류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자신의 삶은 고단하고 즐거움이 없지만, 아들의 삶은 자기와는 다르게 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부성애의 모습이 담겨 있다.
혹시라도 자기 신분이 탄로 날까 봐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차마 경찰에게 도움도 청할 수 없는 카를로스는 일상 속에서도 한마디로 길에 침 한 번 뱉지 않으며 '준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고, 그러한 모든 노력은 바로 아들의 삶을 위해 수렴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트럭을 사지만, 이내 함께 일하려던 사람에게 도둑질을 당하고 만다.
그러면서 영화는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의 형편없이 어려운 상황을 카메라에 담지만, 그것은 마치 배경처럼 지나간다.
이 영화는 애초부터 불법체류자의 삶에 주목하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가 아니라, 카를로스 부자를 둘러싼 일면 가벼운 감동 스토리로 접근하고 있다는 자세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탓에 카를로스가 철망을 뚫고 트럭을 다시 찾는다는 설정은, 그 무엇보다 아들과 함께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있는 카를로스로서는 강제추방의 길로 곧바로 치닫는다는 점에서 부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성과 이민자에 대한 미국 사회의 배타적 태도에 대한 면모를 전혀 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고되고 어려운 현실이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살아가면 그것이 곧 희망이 아니겠는가 하는 시각이 더 짙게 보였다.
네오리얼리즘의 걸작 '자전거 도둑'과 내용상의 궤가 비슷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현재 미국 이민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한다는 영화의 홍보는 과대 포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현상을 훑는 정도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담고 있는 면에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카를로스 역의 데미안 비쉬어의 연기는 충분히 그럴만한 훌륭한 연기였다.
피곤함과 무력감, 체념과 집념, 기쁨과 슬픔 등의 감정을 연기하는 동안 그는 일관되게 흔들리는 눈빛을 보여주었다.
늘 무엇엔가 쫓기듯이 잔뜩 주눅이 들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람의 삶이 저리 비루하다 보면 저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고, 쉽게 남에게 폐를 끼치려고 하지 않거나, 친절을 베푼 후의 배신에 대한 분노마저 절제해야 하는 서글픔이 느껴졌다.
미국 중산층의 일상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그가 느끼고 생각했을 것들을 짐작해보면, 비단 그러한 모습이 미국 사회의 불법체류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전 세계의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싶어서 씁쓸했다.
사막을 건너야 하는 강제추방의 길로 내쫓기는 그들의 처지는 곧 그들의 삶과 닮아있다는 점에서 결코 희망적이지 않으며, 비관적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떠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계속 반복되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조금 잘못된 홍보 내용에 현혹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나름의 장점이 분명한 영화다.
'더 나은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를로스의 아들 루이스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것과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가치관과 인생관을 자기 삶에 투영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의 고단함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 그것도 그의 뒷모습을 보며 수많은 루이스들은 깨달아야 한다.
세상은 감동하기 위해 살아간다기보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많은 사람의 삶이 이미 감동이라는 것을 잊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느껴야 할 감동조차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면서, 일시적이고 현상적이고 작위적인 감동 스토리에 휘둘리고 있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
비틀리고 굴절된 억지희망보다, 피로하고 짜증나도 우리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게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
A Better Life
감독: 크리스 웨이츠(Chris Weitz)
* 그렇다.
매콤하고 상큼한 멕시코 음식이 생각난다.
물론, 먹는 장면이 뭐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
** 영화와 관련한 마케팅 홍보의 문제점이 어제오늘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외국 영화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인 우리나라 영화계의 현실을 감안하면, 제발 부풀리고 포장하는 홍보는 오히려 역효과라는 점을 일하는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어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갔냐?
카를로스가 나아간 곳이, 그게 밝은 세상으로 보여?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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