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오늘에 어느 날 갑자기 15년 전 첫사랑의 사람이 찾아온다면?
영화는 그렇게 과거의 사람이 불쑥 현재의 나에게 나타나는 멜로 판타지의 형식으로 출발한다.첫사랑, 이 단어만큼 나이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적지 않은 사람의 가슴에 오래도록 박혀있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건축학개론'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이 영화는 그러한 첫사랑에 관한 아련한 기억과 안타까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승민(엄태웅)에게 15년 전의 첫사랑인 서연(한가인)이 나타난다.
서연은 서울의 강남구 개포동에 살며 의사 남편과 살고 있는데 제주도의 친정집 터에 집을 지어달라고 승민에게 부탁한다.
15년 전,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나 알게 된 승민과 서연은 과연 어떤 사이였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런 부탁을 하는 걸까?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것 같은 느낌의 사랑 영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그 이야기는 펼쳐진다.
짧지 않은 시간을 통과해서 문득 내 앞에 나타난 어떤 사람으로 말미암아 지난날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일은, 어쩌면 당장은 달콤한 맛이 먼저 느껴지겠지만, 회상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쓴맛이 느껴지는 당의정을 녹여 먹는 듯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이미 머릿속의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희미해진 그 기억은 지금의 내 삶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며 느낌표보다는 물음표가 증폭될 것이며, 일찌감치 묻어두었기에 이제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점차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되기도 할 것이다.
영화는 현재의 승민과 서연의 이야기가 하나의 축을 이루고, 과거의 승민(이제훈)과 서연(배수지)의 얘기가 다른 축을 이룬다.
1990년대 중반을 떠올릴만한 증거품들이 소박하게 등장하는 과거의 모습은 그리 멀지 않기에 오히려 더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필름 카메라, 헤어 무스, 삐삐, 하드 용량 1기가 바이트의 컴퓨터 등과 015B, 마로니에 그리고 전람회의 노래.
특히나 서연이 승민에게 건네는 이어폰에는 CD 플레이어에서 흐르는 '기억의 습작'이 담겨 있는데, 특정한 노래 하나가 과거의 기억으로 이끄는 흡인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슴 울컥한 장면이다.
건축학과 새내기 승민은 건축학개론 수업에 지각하며 등장하는 서연을 보고 한마디로 첫눈에 반하게 된다.
대학교에 입학하며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서연이 사는 곳과 승민이 사는 곳이 같은 곳이기에 둘은 금세 친해지게 되는데, 서연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승민은 자신의 마음을 여는 것에 서툴고 소심한 성격이기도 하고, 서연이 속한 방송반 선배이자 자기 과의 선배인 재욱(유연석)을 좋아하는 서연의 마음을 알기에 쉽게 고백하지 못한 채로 시간은 흘러간다.
결국, 서연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 승민은 "꺼져 줄래!"라는 말로 더 이상 만나지 말 것을 선언하며 둘 사이의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이 대목에서 두 가지의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서연의 집 현관문에 귀를 기울이던 승민이 둘 사이의 어떤 대화를 들은 후의 결정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서연이 좋아하는 재욱과 잘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에서 발현된 위악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첫사랑을 '썅년'으로 일컫는 승민을 보면 전자일 확률이 높긴 하지만, 그게 반드시 증오의 호칭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영화는 관객들에게 첫사랑에 관한 꽤 많은 보편적인 정서를 떠올리게 해준다.
풋풋하고 순수하다고 기억하고 있겠지만,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은 실패담이기에 많은 실수와 잘못을 덮을 수도 있는 것일 게다.
추억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것은 과거의 기억이며,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향수이기에 현실로 이을 수는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추억이고 향수이기에 첫사랑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크게 변하지 않으며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서울의 정릉을 무대로 한 과거의 서연과 승민,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현재의 서연과 승민의 모습은 마치 집을 지어나가는 과정처럼 벽돌 하나하나가 쌓이고, 기둥 하나하나가 세워지며, 차츰 전체적인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30년이 된 옛집을 헐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을 기반으로 해서 증축해나가는 과정은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아우르는 형식과 닮아 있어서, 감독이 가진 어떤 의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관객에게 충분한 이해의 시간을 준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자면 아쉬움과 만족스러움이 공존한다.
딱 그 시대에서 튀어나온 듯한, 순진하지만 찌질하기도 한 승민 역의 이제훈은 전반에 걸쳐 균일하고 안정적인 연기라고 생각한다.
과거 서연 역의 배수지는 보통의 남자들이 떠올릴 첫사랑의 이미지에 걸맞았고,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아쉬움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경력이 오랜 엄태웅과 한가인이다.
15년이라는 세월이 사람을 180도 바꿔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긴 해도 현재 승민의 캐릭터는 과거와의 괴리감이 다소 크게 느껴졌고, 그런 탓인지 극 초반과 중반을 지나 결말까지의 엄태웅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는 느낌을 계속 갖게 했다.
현재 서연 역의 한가인은 확실히 표정과 대사를 통한 감정의 전달이라는 면에서 뭔가 생략되거나 과장된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현재 서연이 왜 15년 만에 승민을 찾았는가의 이유가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구성 탓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를 본 많은 관객에게 입소문이 난 납뜩이 역의 조정석은 과거 송강호와 송새벽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는 무게감으로 다가왔지만, 감독의 자신감인지 욕심인지 모르겠으나 너무 반복되는 과잉된 분량 탓에 그 맛이 반감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납뜩이의 '키스학개론'에 대한 기억은 오래도록 머릿속에 머무를 것 같다.
이 영화는 많은 사람에게 첫사랑에 관한 보편적인 정서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측면에서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다소 허술한 부분이 있어도 그것 자체가 첫사랑과 닮아있다는 면에서 오히려 결과적으로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첫사랑과 영화가 닮았다는 것은 느낌표보다는 물음표가 많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잘 정리되고 정돈되어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정제된 내용이 아니고, 마치 영화에 지은 집처럼 군데군데 과거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나 굳이 설명하고 설득하려 들지 않고 15년 전의 이야기가 다시 15년 후로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서연은 도대체 왜 승민을 찾아온 것일까?'라는 의문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활발히 이야기할만한 뒷담화 거리가 아닐까?
석연치 않은 서연의 등장은 그렇기에 다양한 이야기와 사연을 가진 많은 사람에게 자의적인 해석으로 공감대를 확장하지 않을까?
치기 어린 그 시절, 청춘이라는 것만으로 이해되기도 하면서도 청춘이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때의 이야기들.
세월이 지나 아무리 다시 되돌리고 싶어도 이미 찌그러지고 녹슨 철문은 새것이 될 수 없다는 것.
새끼손가락 걸며 약속했던 만남은 시간이 흐른 뒤에 고스란히 그때의 질량과 부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
영화는 그렇게 사람의 존재에 배인 세월의 의미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새로 짓기'가 아니라 '더해 짓기'를 택한 서연의 생각은 지난 시간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는 것일 테고, 그 공간에서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고 싶다는 바람이 더해진 것이며, 그것이 곧 삶과 건축의 공통점에서 얻게 되는 묵직한 교훈일 것이다.
건축학개론
감독: 이용주
* 서연과 승민이 다니던 대학교가 서울의 신촌 부근으로 보이던데, 서연은 왜 정릉에 방을 얻었을까?
친척과 함께 지낸 것도 아니라면, 정릉에서 신촌은 너무 멀지 말이다. -_-..
** 승민은 'GEUSS'를 정말 'GUESS'로 알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입었던 것일까?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이, 그것도 분명히 짝퉁인 걸 알면서 입었을 정황이라면, 뻔히 철자가 틀린 티셔츠를 입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말이다. -_-.. 난 이런 것들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거슬린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관에 의한 억측(guess)일 수도 있지만. ^^;..
*** 납뜩이라는 캐릭터가 분명 웃음을 유발하는 재미를 주긴 하지만, '넘버 3'의 송강호와 많이 닮지 않았나?
그래서 사실 영화에 몰입하며 웃기보다는 '넘버 3'의 송강호가 생각나며 웃게 되면서 살짝 재미가 반감되었다.
**** 영화 포스터에 있는 문구,'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참 객관성도 없고, 근거도 없는 허접한 카피라고 생각한다.
'영화。kⓘnⓞ。'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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