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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그레이: 생존을 향한 투쟁, 의지가 꺾이는 순간 쓰러진다!

evol 2012. 2. 29. 23:23

 

 

흔히 우리의 삶이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 표현을 할 때 '험하고, 고통스럽고, 고독한' 등의 형용사를 앞에 달곤 한다.

그 험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혼자서 헤쳐나가기에는 너무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역경이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그러한 고난에 맞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가다 보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하고 싶은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어떤 이는 그 상황을 끝내 이겨내고 극복의 삶을 살아갈 것이며, 어떤 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정체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주인공 오트웨이(리암 니슨, Liam Neeson)는 알래스카 지역에 있는 정유 공장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들을 야생동물 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프로페셔널 가드로 일하고 있는데, 아내를 잃은 뒤로 깊은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채로 삶의 희망없이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총구를 입에 넣고 자살을 시도하려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된다.

삶에 대한 의지도 없이 죽음의 문턱으로 자신을 끌고 갔던 그가 정신을 차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더 그레이'는 삶에 대한 태도, 생과 사의 갈림길에 관한 어두운 주제를 담은 영화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인간에게 닥치는 재난의 상황을 소재로 하는 이른바 '재난 영화'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의 지대에 추락한 비행기, 여기저기에 처참한 모습으로 널린 시체들, 통신은 두절되고, 마땅한 음식료품도 없는 상황인데,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설원의 포식자 중 하나인 야생의 늑대떼가 그들을 노리고 주위를 맴돈다는 것이다.

 

오트웨이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비행기의 잔해로부터 추위를 피할 옷가지와 불을 피울 땔감 등을 모으며 상황을 정리해보지만, 비행기가 추락할 때 입은 부상으로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서 자신들의 주위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게 된다.

늑대의 습격을 받아 희생자는 속출하게 되고, 고립무원의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악화되어 간다.

삶에 대한 흐릿한 희망을 품고 살 길을 찾아 걸음을 옮기지만 그들 앞에는 끊임없는 절망의 상황이 계속 도래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화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어슬렁거리는 죽음과 대비시키며 진행해나간다.

실낱같은 희망에 비해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절망의 형상은 잠시 그 모습을 감추는 것 같지만 이내 다시 반복되고 만다.

그런 절망적인 죽음의 공포를 지닌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 바로 늑대들이다.

맹렬하고 살벌한 기세로 생존자들을 위협하는 늑대들과 그에 맞서는 생존자들의 모습에는 삶과 죽음의 쟁탈전이 담겨 있다.

 

생존자들과 늑대의 대립 구도와 별개로 생존자들 안에서의 갈등 또한 영화에서 한 줄기의 이야기 구조로 짜여 있다.

몹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그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도 될까 말까 한데, 그 안에서 누군가는 갈등과 반목으로 서로 간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기도 하고, 마땅한 대안을 내어놓지도 못하면서 상황을 불평하고 사람들을 이죽거린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그래, 저런 사람 꼭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게 되면, 이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와 삶의 문제와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재난을 타개해나가는 모험과 늑대와의 사투를 벌이는 액션으로 볼 수 있겠고, 게다가 한 사람 한 사람씩 죽어나가는 공포 영화의 장르적 법칙도 적용되어 있지만, 그것은 곧 거칠고 험난한 세상과 우리들의 삶에 놓인 고민과 갈등,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과정과 그 속에서 우리의 삶에 희망과 용기를 거두게 하는 절망과 포기의 환경을 비유적으로 표현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면, 시험을 이겨내고 난관을 극복해나가다가 때로는 힘들고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나게도 되고, 그러한 순간에는 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신적인 존재 혹은 그와 유사한 존재(이를테면 세상을 떠난 가족 등)에게 기도하기도 하고 원망을 늘어놓기도 하며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역시 그런 상황이 보인다.

절박한 심정으로 제발 도와달라며, 도와준다면 평생을 충성하겠다는 맹세까지 하면서 말이다.

 

하늘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오트웨이는 절규한다.

"신이시여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지금 도와주시면 평생 믿겠습니다. 맹세합니다."

하늘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고 움직임도 없다.

"아니! 됐다. 내가 알아서 하지."

 

 

 

종교적 신앙심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므로, 신(어떤 특정한 종교의 신과 관계없는 일반적인 의미의)이 도와줄리 만무하다.

주인공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의 아버지가 쓴 시를 떠올리며 다시금 절망을 딛고 삶의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한다.

무척이나 인상적인 장면이었고, 마음에 와 닿는 문구였다.

 

'한번 더 싸워보세.

마지막으로 폼나게 싸워보세.

바로 이날 살고 또 죽으세.

바로 이날 살고 또 죽으세.'

 

 

 

 

영화가 보여주는 절망과 죽음의 회색빛 기운이 잠시 걷어졌던 순간은 생존자들이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아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는 때가 유일하다. 각자가 지닌 행복했던 시간을 이야기하며 어두컴컴하고 춥고 고된 현실을 잠시 잊는다.

바로 그때에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들이다.

그들 대부분이 고되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임을 고려했을 때 그들이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먼 곳에 떨어져서 힘든 노동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삶은 희망보다는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고, 인간의 생존은 늘 두려운 현실과 맞서야 한다.

그 현실은 인간에게 늘 끊임없는 문제를 던지고 그것을 풀어내야만 살려주겠다고 위협한다.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사람도 있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영화는 그렇게 인간의 삶에 깃든 고난과 절망 속에서 어떤 것이 힘이 되는 것인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The Grey

감독: 조 카나한(Joe Carnahan)

 

* 미국의 TV 드라마 로스트(Lost) 이후에 오랜만에 접하는 비행기 추락사고의 광경을 목격했다.

그 생생한 현장감과 아비규환의 분위기는 굉장히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 비행기 안에서 서비스되기는 글렀다.

 

** 늑대가 그렇게 무서운 동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참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공포 영화나 괴수 영화에서 보인 것과는 다른, 살아 있는 야생의 맹수가 풍길 법한 그런 모습으로 묘사된 탓인 것 같다.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별로 알고 싶지 않을 정도다.

 

***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곤 한다.

한숨부터 나온다.

그동안 여러 영화를 통해서 오지로 떠나는 여행에 대한 생각은 접어왔지만,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극지방으로 한 번쯤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해왔는데, 포기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아니! 나는 극복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을 포기하련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