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kⓘnⓞ。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촘촘하고 묵직하게 길어올린 첩보영화의 그물망

evol 2012. 2. 28. 21:22

 

 

이른바 냉전 시대라고 불리던 1970년대 초반, 서커스라고 명명되는 영국 정보부의 지휘 책임자인 컨트롤(존 허트, John Hurt)은 조직 안에 소련의 첩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면서 그 첩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정보부 요원인 짐 프리도(마크 스트롱, Mark Strong)에게 임무를 주는데, 작전이 실패하고 첩자를 찾으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한편, 오랜 세월 컨트롤과 함께 정보부를 이끌던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만, Gary Oldman)도 함께 일선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 후, 정부의 책임자로부터 일명 '두더지'라고 일컬어지는 이중 스파이가 다름 아닌 서커스의 최고위 간부급 요원 4인 중에 한 사람이라는 첩보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는 조지에게 그 두더지를 색출하라는 임무가 부여된다. 영화는 바로 영국의 비밀 정보국인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 MI6(Directorate of 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6)로 불리는 군 정보부 제6과의 요원들과 그 요원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쯤 되면 영화는 정교하게 짜인 순서대로 진행되는 이야기 구조와 쫓고 쫓기는 속에서 빚어지는 숨이 막히는 추격전, 또는 화려한 액션과 고도의 심리전 등으로 구성된 속도감으로 전개되는 스릴러 장르의 영화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스릴러 영화와는 무척이나 다른 아주 냉랭하고 건조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다소 느릿하게 표현되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의 세계 질서를 관통하는 냉전 시대의 느낌을 한껏 되살리기 위한 지극히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무대가 영국을 위주로 하기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영화에는 무엇인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처럼 박무가 낀 듯한 느낌의 이야기 전개와 함께, 급박하게 뛰어가거나 뒤바뀌는 형국보다는 차분하고 조용히 상황을 되짚고 정리해나가며 조금씩 천천히 주변부로부터 중심을 향하는 방식의 구조가 담겨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지극히 현실적인 분위기로 그려진 첩보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말하는 데 있어서 배우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묵직한 존재감으로 자리하는 게리 올드만을 필두로 해서, 빌리 헤이든 역의 콜린 퍼스(Colin Firth), 최근 떠오르는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는 피터 길리엄 역할을 맡았고, 리키 타르 역의 톰 하디(Tom Hardy)와 로이 역의 시아란 힌즈(Ciaran Hinds), 퍼시 역의 토비 존스(Toby Jones) 등등 그 면면에 노련함과 연기력이 충분한 배우들로 등장인물 진용이 짜여 있다.

 

영화는 첩보 소설 장르에서 손꼽는 명작으로 평가된다는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그쪽 분야의 소설에서는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며, 이미 1979년에 영국의 BBC 방송에서 TV 시리즈로 제작되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인 2008년 작품 '렛 미 인(Låt den rätte komma, in Let the Right one In)을 만든 감독인 토마스 알프레드슨(Tomas Alfredson) 감독이 감독을 맡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가 흘러감으로 말미암아, 영화를 보는 관객의 처지에서는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필요하다는 점과 여러 인물이 교차하며 등장하는 다양한 시점의 이야기가 엮여있다는 점에서, 내용의 모든 걸 다 자세히 설명하고 웬만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는 식의 드라마 화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영화의 흐름을 좇아가기에 다소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야기와 이야기의 연결 고리가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영화의 전체적인 그림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는 것에는 커다란 어려움이나 장애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래도 최근 첩보 영화의 경향이라고 하면, '007시리즈'나 '본(The Bourne)시리즈'처럼 말초적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라든가 일면 판타지처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살아남는 등의 비현실적인 영화 일색인데 반해, 그야말로 냉혹한 사회상의 현실을 반영하고 그러한 현실을 토대로 삼아, 엄존하는 첩보 요원들의 암투와 이면을 담은 이 영화는 그 나름의 재미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런 유형의 영화는 원작 소설을 읽은 사람이나 이런 형식의 첩보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이해하기에 훨씬 수월하며, 사전에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고 영화를 보는 것이 영화의 내용을 온전하고 충분히 받아들이는 방법이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이 어쩌면 영화가 지닌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겠는데, 이 영화가 첩보 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영화가 주목하는 부분은 누가 스파이인지 알아내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결말 지점에서의 한방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 연출 방식이 어느 면에서는 약간 허탈감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그런 느낌조차 감독이 의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스파이의 정체가 밝혀지고 난 후에 느끼게 되는 감정이라는 게 후련하다기보다는 적잖이 씁쓸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등장했던 인물들의 모습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천천히 화면에 잡히면서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허망함과 서글픔, 그리고 그들의 삶에 배인 인간적인 불행함과 욕망 등이 한데 뒤섞이며 녹아내리는 것 같던 결말의 느낌이 왠지 조금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했다. 국가와 국가의 대립 구도 속에서 과연 개인의 삶이라는 것, 혹은 조직 안에서 개인의 위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엿보게 되면서, 하나의 사실을 두고 두 개의 진실이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의 냉혹함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Tinker Tailor Soldier Spy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 외국 영화의 우리나라 판 포스터나 홍보 문구를 보노라면 그 담당자가 영화를 보기는 했는지 생각될 때가 있다. 아직도 초점을 다른 데다가 맞추고,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관객이 더 흥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하는 건가? '충격 실화'라느니, '스파이 전쟁'이라느니 하는 표현은 그야말로 1970년대식의 진부한 표현처럼 느껴진다.

 

** 벌써 후속편이 제작에 들어갔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이렇게 스타일이 분명한 지난 시대의 첩보 영화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기대가 될뿐더러, 중후함이라는 단어가 그리도 잘 어울리는 게리 올드만이 다시 출연한다는 것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