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알츠하이머의 치료 약을 개발하는 과학자 윌(제임스 프랑코, James Franco)은 침팬지를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한다.
마침내 약의 효과를 확인하고 인간에게도 실험할 수 있는 설명회를 가지기 직전, 실험 대상이던 암컷 침팬지 '반짝이는 눈'은 새끼를 낳은 탓에 공격적인 본능을 표출하게 되고 실험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만다.
제약회사의 이사회는 이 사건을 두고 아직 완전하지 못한 약의 불안정함이라고 판단하고 윌의 실험을 중지시킨다.
실험 대상이던 모든 침팬지를 안락사하기에 이르게 되지만, 윌은 '반짝이는 눈'의 새끼를 집으로 데려가게 되고 어미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덕에 높은 지능을 보이는 새끼 '시저'를 관찰하며 약의 개발을 위한 연구를 계속 이어간다.
이 영화는 1968년 작품인 '혹성탈출'의 앞선 이야기를 다룬 이른바 '프리퀄(Prequel)'이다.
인류의 역사를 뒤엎어버린 유인원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기원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 내용에는 유인원의 지도자 격인 시저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랐으며, 인간과의 소통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어떤 사건을 통해서 인간과 자신과의 차이와 다름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정체성과 동족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되는가를 자세히 담고 있다.
그러한 연유로 영화를 보는 관객은 많은 부분을 인간의 편에서가 아니라 유인원의 편에서 영화의 내용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런 탓에 영화는 다분히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더욱 유인원에 대해 연민에 빠지게도 된다.
동시에 시저가 인간의 애완동물의 차원에서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획득하고 자기 존재의 성찰을 하는 대목은 섬뜩함을 안겨주기도 하면서도, 마치 로마 지배세력에 반란을 일으키는 스팔타커스를 보는 듯한 저항의 쾌감을 받기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과 느낌과 별개로 영화는 인간의 역사 혹은 인간의 역사에서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애완동물'이라는 명목하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루고 길들여서 곁에 두며 키운다.
흔한 예로, 개에게 하는 걸 보면, 털을 깎고 옷을 입히며 염색도 시키는 걸 넘어서 성대를 제거하고 중성화 수술을 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 과정을 개도 좋아할까?
인간의 시점에서 동물을 다루는 행위에 대해서 그것이 사랑해서라고 이유를 붙인대도 동물도 그렇게 받아들일까?
윌의 여자친구인 캐롤라인(프리다 핀토, Freida Pinto)이 말한 것처럼 인간과 유사한 이유로 침팬지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또한 동물인 탓에 두려움도 있다는 것은 인간이 동물을 자기들의 뜻과 효용에 맞게 길들이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인간의 시각에서는 굉장히 유쾌하지 못하고 생각하기도 끔찍한 내용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저(앤디 서키스, Andy Serkis)가 인간에게 폭행을 가한 이유로 보호소에 갇히게 되었을 때, 윌의 손엔 항상 목줄이 들려 있었다.
윌은 시저를 사랑한 것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감정으로 대했음에도 인간과 동물이라는 구도를 넘어서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모습 속에서 영화를 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시저의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 더 이상 자기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윌, 자기와 함께 돌아가자는 말에 "NO!"라고 말하는 시저를 보며 그동안 시저의 처지를 이해했던 그지만 낯선 두려움도 함께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유인원 시저가 인간에게 던진 첫 번째 말이 "아니!"라는 부정과 거부의 의사 표현이라는 것,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 거부와 불복종의 표시가 비단 동물이 인간에 대해 던지는 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어떤 모습으로 읽혀서 꽤 머리가 무겁기도 했다.
시저와 함께 나오는 여러 유인원의 등장 장면에는 대사가 없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이뤄지는 질서의 재편과 동화 과정에 대한 섬세한 연출력 덕분에 이해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다.
특히 앤디 서키스의 표현력과 더불어 그 연기를 엄청난 기술력으로 덧입힌 기술진의 실력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블록버스터라는 대규모 물량이 투입되는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장르의 힘과 의미가 고스란히 발견되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시저가 보호소에 갇힌 감옥과도 같은 공간의 벽에 창문을 그리는 모습이었다.
그 창문의 모양은 시저가 윌과 함께 태어났을 때부터 지내던 방의 창문 모양과 같다.
시저는 그 창문 너머로 늘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갖곤 했던 곳이었고 그 이후에 보호소에 갇히게 되면서도 그 벽에 창문을 그리며 바깥으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지만, 스스로 그 문양을 지우는 모습 속에서 이제 더 이상 예전에 윌(=인간)과 함께했던 공간의 바깥이 아닌, 각성한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의 공간을 뛰어넘어 경계의 다리를 건너 광활한 숲이 있는 자기들의 공간으로 향하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의 의미를 볼 수 있었다.
애완동물인 침팬지에서 정체성을 자각한 새로운 종의 존재로 거듭난 유인원들.
그 존재들이 살아가야 할 곳은 기존의 인간이 구성한 환경과 사회가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선 새로운 공간이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건너야 할 다리를 지나려면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사회를 탈출한다고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그들을 길들여서 억압하게 될 인간 사회를 전복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필연적으로 그런 과정이 놓여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울창하고 거대한 나무들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자기들이 벗어난 인간의 공간인 도시를 보는 시저와 유인원들.
그들은 과연 그 순간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고 또한,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혹은 무슨 일을 벌여야 할지를 깨달았을까?
동시에 인간은 얼마만큼 교만한 태도와 안이한 자세로 다시금 그들을 지배하려는 판단을 했을까?
하지만, 그 이후 인간에게 얼마나 불행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한 결과가 영화라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또한 무서운 이유는 인간의 어리석은 역사가 계속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감독: 루퍼트 와이어트(Rupert Wyatt)
* 벌써 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CG를 많이 담은 블록버스터인데도 캐릭터의 심리를 다루는 솜씨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퍼트 와이어트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버금가는 감독이 될는지도 기대가 된다.
**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람이 앤디 서키스가 해 왔던 모션 캡쳐 배우로서의 뛰어난 역량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골룸과 킹콩을 거쳐서 이 영화의 시저 역할까지 그의 역할 비중을 보면 그런 얘기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건 그는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구축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 영화를 본 후에 새삼 든 생각이 있다.
오늘날 지구 상에서 얼마나 많은 동물이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실험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지.
그 동물들에게 고마움을 갖지는 못할망정 학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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