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살해하고 교도소에 갇힌 애나(탕 웨이)는 엄마의 장례식 때문에 7년 만에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시간, 애나는 얼굴에 그 어떤 감정이 담긴 표정도 어색할 뿐이다. 세상은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고, 가족들이 애나를 대하는 태도 역시 미온적인 상황에서 애나는 더욱 침울해진다. 한나절이라도 다른 사람처럼 새 옷도 사서 입고 화장도 해보지만, 애나는 교도소로의 귀환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망치듯 올라탄 버스에 낼 차비조차 없는 훈(현빈)은 천연덕스럽게 낯선 여자 애나에게 돈을 빌린다. 얼핏 봐도 진지함과 진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훈의 모습에서는 가벼움과 뻔뻔함만이 보인다. 훈은 여자들에게 에스코트 서비스를 하며 지내는데 어떤 여자의 남편으로부터 도망치는 중인 속칭 제비의 삶을 살고 있다.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애나에게 훈은 하루를 재미있게 보내자고 한다. 빌린 돈 대신에 자기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애나에게 채워주면서, 그저 그렇게 장난처럼 둘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스산한 늦가을, 이미 떠나가고 있는 시간이다. 건조하고 추운 겨울로 가는 길목에 시간은 놓여 있다. 애나에게 바깥의 세상은 오랜만에 한 귀걸이가 주는 가려움증처럼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주변의 것으로부터 스스로 차단하고 마치 희뿌연 안갯속의 존재처럼 자신을 은폐시키고자 한다. 세상은 변하지만, 교도소 안에서의 애나의 시간은 변화가 없이 그저 흘러가고만 있었다.
그런 애나에게 훈은 시간의 흐름을 씌워준다. 훈은 애나의 과거나 그 지나간 시간 속에 담긴 상처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어처구니없게도 자기와 애나가 부부인 것처럼 꾸며서 애나의 이름을 알아낸다거나 수륙양용 오리배를 타고 범퍼카를 타며 즐거워하는 훈의 유치한 행동에 애나는 아주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무엇인가를 버리듯이 훈과의 섹스를 제안했다가 그만두는 과정에서도 애나는 이미 자기 심경의 작은 변화를 느꼈을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원작을 미국의 시애틀이라는 공간으로 옮겨서 중국계 여성과 한국계 남성의 만남으로 변주한 영화는 촘촘하게 잘 짜여진 각본으로부터 비롯된 느낌보다는, 안개 도시인 공간 자체와 그 속에서 크게 변화하진 않지만, 분명히 변화하는 두 사람의 마음과 표정을 집중해서 바라보게끔 하는 연출로 이끈다. 낯선 두 사람이 낯선 공간에서 어떻게 만나게 되고 어떻게 소통하게 되는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의도적인 연출인지는 모르겠지만, 극의 흐름이 매끄럽게 이어지며 시간의 양이 쌓이면서 내용의 질적인 변화가 고양되는 측면에서는 다소 불균질하고 조화롭게 연결되지 못하고 튀는 구조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애나의 전 남자친구인 왕징(김준성)과 훈이 몸싸움을 하는 장례식 후의 식당 장면은 짜증스러운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고, 놀이공원에서의 판타지성 장면은 그 양적인 길이가 너무 길기도 하고 어색함이 지나쳐서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 추억이고 집착일 뿐이지."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왜 그렇게 변한 건가요?"
애나는 훈에게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자기의 이야기를 꺼낸다. 중국어를 모르는 훈은 대충 '하오(좋다)'와 '화이(나쁘다)'를 섞은 대답을 하며 애나의 이야기를 듣는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서로의 눈빛과 표정으로 대화하는 그 장면은 김태용 감독이 만추에서 담고자 한 내용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다른 영어권 평론가들의 혹평이 가해졌던 애나와 훈의 지나치게 문법적으로 완벽한 영어 대사는 상대적으로
두 사람이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과연 훈의 캐릭터가 그렇게 원어민의 어법으로 영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 적절한가? 영화적 리얼리티를 위해서라도 고려해봤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는 애나의 표정이 변하는 속도처럼 느리게 진행된다. 두 배우가 입은 옷의 색처럼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 속의 장면도 가을의 색처럼 갈색의 색감을 지니고 있다. 안개가 가득한 세상의 풍경은 여전하지만, 애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혼자가 되었지만 더 이상 혼자로 살아가진 않을 애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애나를 연기한 탕 웨이의 무게감이 영화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훈은 애나를 주도하는 역할이라기보다는 애나에게 자극과 계기를 제공하는 역할이니까 말이다. 애나가 훈에게 사랑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감정의 흐름이 아니라 멈춰 있고 굳어 있던 애나가 변화하는 과정, 스스로 유폐했던 자신을 다시 끄집어내는 과정을 통해 애나의 삶이 애나의 시간이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상대적인 측면 탓인지 훈의 마음과 감정은 온전히 다 받아들여지지가 않기도 한다. 훈이 애나에게 느꼈던 게 사랑이었을까?
물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느끼는 게, 반드시 완성된 감정의 덩어리로 시작되진 않지만. 그 격렬한 키스신에서 훈의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사랑과 관련한 쪽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안타까운 자기연민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애나와 훈의 관계가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인 구조로 짜여진 탓인 것 같다.
2년 뒤에 만나자고 했던 애나와 훈의 약속은 실현될까? 모습을 보이지 않는 훈을 기다리던 애나가 슬며시 웃음을 보이는 이유는 어떤 의미일까? 기다린다는 것은 떠남이 선행됨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헤어짐의 전초일 수 있고, 시간의 흐름은 언젠가 그것을 실현시킬 수도 있다. 애나의 웃음이 마냥 즐겁게만 보이지 않았던 것은 삶의 시간이 담은 엇갈림과 어긋남이 주는 상처와 고통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 그것만으로 사랑의 의미를 가두고 축소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느낌을 함께 나눈다는 것, 위로가 되는 것, 믿을만한 존재가 된다는 것...... 아무리 살아도 낯선 세상, 아무리 교차해도 낯선 사람들. 거기에서 사람과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소중한 것은 바로 시간이 아닐까?
더군다나 곧 인생은 겨울로 치달을 것처럼 늦가을, 만추에 서 있다는 걸 모르는 채 삶의 시간을 낭비하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은가. 삶 자체가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허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삶의 시간을 쓰는 사람에 따라서 그 삶의 의미와 형태가 달라지는 게 맞지 않을까? 누군가 나에게 건넨 시간, 그 한정된 삶의 시간 동안, 넓은 의미에서의 '사랑'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할 것 같다. 세상을, 사람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시간, 사랑하지 못하는 시간을 대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晚秋, Late Autumn
감독: 김태용
* 누구나 그렇겠지만 탕 웨이의 웃는 모습은 참 예쁘다. 그 웃음이 흔하게 흘리는 웃음이 아니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나보다. 자기 혼자 웃는 웃음과 달리 누군가에게 보여질 웃음의 가치는 그렇게 스스로 높이를 쌓을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게 이만희 감독 원작의 필름이 없어서 원작을 볼 수 없다는 게 슬프다. 내가 기억하는 만추는 김혜자, 정동환 주연의 TV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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