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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전: 진심의 노력을 다해 엮어나가는 삶의 가치

evol 2014. 2. 26. 07:38

 

 

"요즘 시대에 누가 이런 걸 읽냐?"

 

학창 시절, 교과서와 자습서가 빼곡히 자리 잡은 책상 위의 책꽂이에는 두꺼운 사전 몇 권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국어사전과 영한사전, 그리고 한문사전인 옥편까지, 중고등학생 때부터는 기본적으로 놓여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며 점점 얇디얇은 종이로 만든 두꺼운 사전은 책상에서 사라져가고 손쉽게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전자사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물론, 지금은 거의 누구나 가진 휴대폰 속에도 그 기능을 대신하는 스마트한 사전 애플리케이션이 들어있다.

 

영화 '행복한 사전'은 1995년 일본의 어느 출판사에서 '대도해'라는 국어사전을 펴내기로 하면서,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회사 안에서 독특한 인물로 알려진 영업부 직원 마지메(마츠다 류헤이, 松田龍平)가 사전편집부로 자리를 옮기며 시작된, 자그마치 15년에 걸쳐 진행된 사전 만들기 프로젝트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전편집부에는 곧 은퇴를 앞둔 대선배로부터, 사전 만드는 일을 지루하게 생각해서 그만두고 싶어하는 마사시(오다기리 죠, オダギリジョー)를 비롯하여 몇 명의 사람들이 한 팀을 이루어, 오로지 사전을 엮어내기 위해서 15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한다. 느릿한 호흡으로 차분히 펼쳐지는 이야기가 예상외로 흥미롭다.

 

 

 

'당신은, 진심을 다해 현재를 살고 있나요?'

 

영화에는 단어 하나에 깃든 뜻과 풀이가 얼마나 많은 손길과 노력으로 사전에 오르게 되는지, 수많은 단어의 바다에 떠다니는 단어가 얼마나 진심 어린 사람들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가 담겨 있다. 사전을 엮어내는 과정이 얼핏 생각하면 재미없고 한없이 지루하게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타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살던 주인공 마지메가 사전편집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은 그렇지만은 않다. 사전에 담을 단어를 찾아 모으는 과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의 문을 열어가는 마지메의 변화, 거기에 불을 댕기게 된 계기는 하숙집 주인의 손녀인 카구야(미야자키 아오이, 宮崎あおい)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단아하면서도 당찬 모습의 카구야에게 첫눈에 반한 마지메, 그런 사실을 눈치챈 동료 직원들은 은근히 그를 응원하기 시작하고, 대선배인 마츠모토(가토 고, 加藤剛)는 그에게 '사랑'이라는 단어에 관한 일감을 맡긴다. 그 이후로 무려 3천만 개의 단어를 사전에 담아 온 사전의 출간을 앞두고 실수로 빠트린 하나의 단어를 발견하게 되면서 사전의 성공적인 출간은 위기를 맞게 되는 시점까지, 영화는 사전 '대도해'의 완성과 마지메의 수줍고 조심스러운 사랑과 삶을 느릿한 속도 속에 단단하게 엮어나간다.

 

빠른 속도와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건들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더께와 사람의 손길이 쌓여야만 이뤄지는 '사전 만들기'의 과정은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며 성장하고 변화하는 인생과 매우 닮았음을 확인한다. 진심은 곧 노력이고, 노력은 곧 진심의 발현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하는 그 과정을 보는 시간은 사각거리는 사전의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처럼 평안함을 안겨준다.

 

 

 

The Great Passage

감독: 이시이 유야(石井裕也)

 

* 어딘가 살짝 빈 듯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마츠다 류헤이, 그와는 대조적인 매력을 이루는 오다기리 죠의 조합이 의외로 잘 어울리고, 깔끔하면서도 담백한 일본 음식의 맛 같은 매력의 미야자키 아오이의 모습도 안정감 있게 보인다.  

 

** 중학교를 입학하며 부모님께 선물 받은 사전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아니, 그게 사라질 리가 있나? 내가 버렸을 거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