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 치하의 폴란드 르보프(Lvov,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에서 있었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대인에 대한 독일군의 무참한 학살이 시도 때도 없이 이뤄지던 그곳, 마침내 더는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끼자 유대인들은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제 잇속을 챙기려는 자들이 있었는데, 레오폴드 소하(로버트 비에키에비츠, Robert Wieckiewicz)가 바로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하수도를 관리하는 일을 하던 그는 독일군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의 집을 털어 돈이 될만한 것들을 챙기더니, 급기야 피하다 피하다 못해 하수도로 도망친 유대인들과 하수도에서 마주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신고할 수도 있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숨을 곳을 안내해주고 음식을 날라다 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 챙긴다.
그렇게 해서 소하의 도움으로 은신처를 얻게 된 11명의 유대인들은 빛 하나 들어 오지 않고, 쥐들과 벌레가 몸에 기어오르고 온갖 오물이 떠다니는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신문을 통해서 독일군의 전황이 불리함을 접한 그들은 독일군의 패배를 고대하며 매주 꼬박꼬박 소하에게 돈은 물론이고 숨겨 두었던 보물까지 넘기며 목숨을 부지해나간다. 영화는 하수도에서 장장 14개월 동안이나 숨어서 지낸 유대인들의 생활과 그들 속에서의 마찰과 반목, 그리고 그들을 돕는 일을 돈벌이로 여기다가,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위험에 처하게 되자, 심각한 갈등에 빠지게 되는 인물인 소하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유대인에 대해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던 소하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을 끝까지 도운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영화는 그 역시 처음에는 유대인을 열등하게 취급했고 오직 돈 때문에 그들을 돕기 시작했지만, 그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그들 생활의 고됨을 들여다보며 조금씩 변화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한 소하의 마음에는 아마도 유대인들에 대한 책임감이 싹텄기 때문일 게다. 동정이나 연민, 책임감 등의 감정이라는 게 넓은 의미에서 모두 타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보았을 때, 소하는 자신의 가치관이 변하게 되면서 그들을 책임질 수 있었던 것일 게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현실의 삶 속에서 구현한 쉽지 않은 실천이다.
영화의 상영 시간 대부분은 어두컴컴한 하수구를 무대로 이뤄진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생존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둠과 빛을 통해 보여주는 광경은 마치 지독한 삶의 현장을 체험하는 느낌이 든다. 하수도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감히 들어갔다가 나오기조차 어려운 공간, 오물은 물론이고 멋모르고 하수구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는 곳, 그렇게 공간이 주는 위압감과 절망감은 그곳에서 마지막 삶의 끈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감정을 표현한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고초를 겪던 유대인들과 그들을 도와 생명을 건지게 해준 영화는 이전에도 적지 않다. 그런 영화에는 선악의 구분이 분명하게 그려지는 일이 보통인데,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저 온순하고 불쌍한 희생양으로 표현되고, 그들을 도운 구원자의 역할을 한 사람은 또한 지나치게 영웅적으로 그리거나 미화하는 면이 많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유대인들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물론 좋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보이고,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돕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도 보인다.
도저히 하루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공간인 하수구에서 생활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평범한 유대인들의 모습이다. 그 와중에 섹스도 하고, 배신하고 도망치고, 싸우기도 하고, 놀기도 하는 모습들 말이다. 소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절대 영웅도 아니고 투사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인색했던 그가, 그야말로 유대인들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그가 그들을 끝까지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자기만의 삶만큼 타인의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각성을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불편함과 어려움을 극복하여 실천할 수 있던 이유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소재가 그리 낯설지 않은 탓에 과연 이런 내용의 영화가 지금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패악한 행위, 그것이 민족과 국가의 차원에서 더는 벌어지지 않는 틀을 지구 상의 인류가 획득했는가에 대한 물음을 감독은 던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영화의 끝 부분에 소하를 비롯해서 폴란드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문득 그런 아픔을 겪고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생각났다. 어둠 속에서 빛을 갈구했던 그들이 이제는 스스로 타인을 어둠 속으로 내몰고 있으니, 이 무슨 지독하고 참혹한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Agnieszka Holland)
* 이 영화의 내용은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개인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감독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유대인 격리 지역에서 죽었고, 아버지는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 나치에 저항했던 지하 조직의 일원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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