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kⓘnⓞ。

전설의 주먹: 낡고 무의미한 전설, 화려하지만 근거 없는 주먹

evol 2013. 4. 12. 23:19

 

 

고등학생 시절에 전도유망한 권투 선수였던 임덕규(황정민)는 2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월세 내기도 빠듯한 국숫집을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는 딸 수빈(지우)이 있는데 학교에서 다른 아이를 다치게 해서 병원비와 합의금을 마련해야 하는 지경에 놓인다. 임덕규는 얼마 전에 방송국 PD 홍규민(이요원)이 찾아와서 TV 격투기 프로그램인 '전설의 주먹'에 출연할 것을 제의한 것이 생각났고, 1승을 거두면 2천만 원이라는 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이끌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마음먹는다.

 

임덕규는 상대로 나온 신재석(윤제문)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예전에 함께 어울려 다니던 사이였다. 한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25년 만에 다시 만난 곳이 이종 격투기의 무대라니 참 묘한 인연이다. 한편, 그 두 사람과 인연이 있는 또 다른 두 사람이 있는데, 한 명은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난봉꾼처럼 살아가는 손진호(정웅인)와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손진호 밑에서 수족처럼 지내는 이상훈(유준상)이 그들이다. 임덕규와 손진호, 이상훈은 사당고의 삼총사처럼 지냈는데, 그들과 맞짱 뜨려던 남서울고의 신재석이 마치 달타냥처럼 나타나서 넷이 함께 어울린 시절이 있던 것이다. 영화는 그들의 과거 어린 시절과 현재의 이야기를 뒤섞으며 내어놓는다.

 

 

 

영화는 네 남자의 인연에 각자의 사연을 더하지만, 그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인물들이 지닌 이야기들은 촘촘한 개연성을 지니지 못하고 대강 줄거리의 흐름에 덧입혀지는 정도다. 25년 만에 예전의 세 친구가 격투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억지스럽지는 않은데, 그 근거가 될만한 이야기의 틀이 부실하다. 그들이 서로 연락을 끊고 살게 된 것은 그럴만하다고 해도, 그들이 그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는 과정의 내용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 주의! 이후에 스포일러가 있음)

 

처음에 딸의 사고 수습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뛰어든 덕규는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2억 원'의 상금이 걸린 싸움판에 다시 나간다. 그건 바로 무슨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아빠를 홀대하던 딸이 꿈을 포기하지 말라며 갑자기 살갑게 굴면서 기운을 북돋우며 응원을 해서다. 한편, 진호로부터의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진호의 사고 뒤처리를 하며 일하던 상훈은 느닷없이 성질을 내며 일자리를 내팽개치고, 기러기 아빠로서 만만치 않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2억 원'을 거머쥐려 출전한다는 거다. 하물며 성인 오락실이나 지키고 앉아 있는 삼류 건달 재석은 별 이유도 없이 등장해서 조직 보스에 반기를 들기까지 한다.

 

 

 

 

왕년에 주먹깨나 썼다는 거야 알지만, 속상하면 술로 풀고 심지어 술 상무 노릇도 하는 덕규와 상훈이 어울리지 않는 초콜릿 복근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영화는 인물의 캐릭터와 이야기, 인물 간의 관계 설정 등에 세밀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영화의 초점은 인물과 사연이 아니라 액션이다.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쇼'를 보여주기 위해서 화려하게 치장된 영화 속 TV 프로그램의 격투 장면에 집중되어 있다. 권투 선수 출신이라 주먹을 주로 쓰는 덕규, 다리를 이용한 킥에 능한 상훈, 다짜고짜 달려드는 재석, 그리고 그들이 맞서야 할 악당 캐릭터인 거북이(서범식) 등으로 짜인 인물들과 철망이 둘러쳐진 격투기장의 장면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아예 노골적으로 간접 광고의 영역을 영화 안에 고스란히 끌어들인 점이다. 영화의 배급을 맡은 CJ 엔터테인먼트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며, 계열사 케이블 채널인 'XTM'을 그대로 등장시킨다. 하긴 영화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격투 프로그램은 '주먹이 운다'라는 XTM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한편, 진부한 스타일의 연기 연출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것도 보기 민망했는데, 그런 낡은 연기가 집약된 인물이 바로 홍 PD 역의 이요원이다. 시종일관 똑같은 표정에 고성으로 소리를 질러대고, 안하무인 격으로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모습은 영화 보기에 아주 심한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감독과 배우, 도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옛날 학창 시절의 주먹들이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잊었던 꿈을 다시 꺼내본다는 영화의 의도를 좀 더 조명받게 하기 위해서는, 치기 가득했던 어린 시절에 품었던 '강자'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어리석은 삶의 길을 이끌었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 '강함'이라는 것이 40대 남성에게 현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는지를 더 깊이 들여다봤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으니, 영화의 인물들은 각자의 감정에 의해 달궈지는데, 그 기운이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까지 온전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애초부터 성립 불가능한 기대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강우석 표 영화가 아닌가! 철저히 남성 위주의 주제와 소재를 다루면서 은근슬쩍 사회의 모순을 입에 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럴듯한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전직 국정원 요원(성지루) 같은 웃음 장치의 인물 배치, 가족애와 우정에 관한 신파적 접근도 여전하다. 못난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는 대사를 통해서, 가족을 위해 사회라는 격투장에 뛰어드는 아버지의 고달픔을 말하면서, 비록 현재의 삶이 부족하고 힘들더라도 꿈을 잃지 말고, 가족과 친구의 정을 돈독히 하며 살자지만, 현실이 과연 그렇게 해결될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냉혹한 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판타지적인 그것도 남성의 격투기에 관한 관심을 담은 것에 불과하다.

 

소모되는 캐릭터와 낭비되는 배우들의 연기가 참 안타깝고, 맥빠지는 결말도 왜 그랬는지 의문이 든다. 친구끼리 싸우는 거 아니라는 얘기가 대체 왜 거기에서 나와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럴 거면 애초부터 옛 친구들을 그런 식으로 불러 모으질 말든가.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에게 '전설'로 회자될만한 게 '주먹'은 아니라는 걸 자신도 모르게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감독: 강우석

 

* 영화가 액션을 중요한 부분으로 사용하면서도 정작 영화 정보를 담은 웹 사이트에는 '거북이' 역 배우 서범식의 이름조차 제대로 올려놓지 않고 있다. 제작사나 배급사의 홍보 담당자의 문제인지, 사이트 영화 담당자의 문제인지 모르지만 그러는 거 아니다.

 

** 감독은 초심으로 돌아갔다지만, 사실 강우석 감독의 영화 스타일은 한결같이 너무 올드하다. 그게 투박하고 묵직한 걸로 인식되어 즐기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영화 연출에 대한 고민이 좀 더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감독의 영향력 때문인지 평론가들은 말을 아끼고 있고, 기자들(평론가를 포함해서 보통 개봉된 영화는 평점 글을 쓰기 마련인데, 4월 12일 현재 달랑 두 명이다.)은 시대감각과 뚝심 운운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재미가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서 여전히 이런 종류의 상업 영화가 우리나라 대중 영화의 주류로 나서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