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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사랑 앞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

evol 2013. 2. 20. 23:12

 

 

바야흐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화두는 이른바 '힐링'이라고 불리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만큼 세상을 사는 것이 고되고 힘들다는 방증이며, 사람이 세상에서 받는 고통을 포함해 인간관계에서조차 온전한 이음새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일 것이다.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제목에서처럼 지금의 삶이 온통 구름으로 뒤덮여서 흐리고 칙칙하다고 해도 구름 뒤로 가려진 희망의 빛이 있음을 잊지 말기를, 그래서 고된 상황에 놓여있다고 해도 희망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사랑하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외도를 벌이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팻(브래들리 쿠퍼, Bradley Cooper)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상대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게 되고,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는 아직도 아내와의 재결합을 원하고 있지만, 극심한 조울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에게는 현실적으로 요원한 일이다. 더군다나 전에 일하던 학교는 물론이고, 아내에게도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져 있으니, 일상적인 연락은 고사하고, 퇴원한 후에도 아내의 얼굴도 못 보는 처지에 놓여 있다.

 

 

 

팻은 퇴원 후에 빨리 일상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마음처럼 그게 쉽게 되진 않는다. 여전히 그는 조울증세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 인식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과대망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엉뚱한 모습을 연출하기가 일쑤이니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가 쉽지도 않다. 쓰레기봉투를 땀복처럼 입고 달리기를 하는가 하면, 친구의 저녁 식사 초대 자리에 자기가 응원하는 풋볼팀의 유니폼을 입고 가는 등,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게 한다.

 

아직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편하지 않은 팻은 망설이다가 그 저녁 식사 초대 자리에 가게 되는데, 거기에서 친구 아내의 여동생 티파니(제니퍼 로렌스, Jennifer Lawrence)를 보게 된다. 첫눈에 눈길이 갈 만큼 매력적인 미모의 티파니지만, 알고 보면 티파니 역시 팻 못지않은 골칫덩어리의 캐릭터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후에 받은 충격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티파니는 다니던 회사의 모든 사람과 잠자리를 가지다가 해고당하게 되고, 그 후로도 툭하면 아무에게나 섹스를 하자며 달려드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갖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티파니는 팻을 처음 본 그날 자기와 함께 자자고 조르다가 팻이 거절하자 욕설을 퍼부으며 화를 내고 헤어지게 된다.

 

 

 

남편에 대한 상실감을 무의미한 섹스로 풀던 티파니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팻에게 관심이 가게 되지만, 과도하리만큼 옛 아내에 대한 집착이 심한 팻은 티파니의 관심을 냉정히 거절한다. 그러다가 티파니가 팻에게 아내와 편지로 연락하게끔 해주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고, 그때로부터 두 사람은 조금씩 만남을 거듭하게 되지만,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서로의 상처를 들쑤시며 부딪히는 일이 잦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상처받은 사람끼리 만났다고 해서 쉽사리 서로를 치유한다는 건 비현실적인 거라고 말한다.

 

아내의 외도 때문에 또라이가 된 팻과 남편의 죽음 때문에 싸이코가 된 티파니의 만남, 두 사람을 등장시킨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의 존재로 말미암아 저절로 순화되고 말랑말랑해진다는 무임승차식 전개를 펼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은 걸핏하면 서로를 물어뜯으며 폭언을 쏟아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이 영화에서 얻게 되는 웃음과 재미의 주를 이룬다. 아무리 로맨스를 다루는 내용이라고 해도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 않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의도는 사람의 상처가 그리 쉽게 치유되기 어렵다는 점과 상처의 치유 과정이 그저 보이지 않게 덮어둔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가진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속속들이 제대로 인식하고, 어설픈 핑계와 변명으로 회피하려 하거나 비겁하게 도망가려고 하지 말고, 아픈 부위를 곪게 하는 문제점들을 더 큰 고통을 감내하면서라도 남김없이 긁어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노력 없이 생각만으로 삶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 영화가 다른 로맨틱 코미디 장르 영화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점은 바로 그런 내용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조금씩 다가서게 되며, 사랑이 싹트고 그래서 서로 보듬어주고, 그로 하여금 상처가 치유된다는 일사천리의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모습을 보며 자기의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고, 그렇기에 자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다짐과 의지로 자기 삶을 온전하게 변화시키는 시작, 거기서부터 상대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다는, 사랑에 대한 일종의 변증법적 해석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중반을 지나는 지점까지 팻과 티파니가 티격태격 빚어내는 이야기는 다른 로맨틱 코미디에서 보통 느끼게 되는 달콤쌉싸름의 이야기들과 다른 맛으로 재미있게 진행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팻의 가족과 뒤섞이면서부터는 다소 안이한 노선으로 변경된다. 물론, 팻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와 어우러지는 에피소드 자체가 부실한 내용은 아니지만, 결말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로는 너무 대놓고 극적인 설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본 사람이면 열에 아홉은 팻 역의 브래들리 쿠퍼보다는 티파니 역의 제니퍼 로렌스의 매력을 이야기하게 될 것 같다. 아무리 형부의 친구라고는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함께 자자며 들이대질 않나, 그 후로도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그 모습에서, 질퍽거린다는 느낌이 들기보다 그게 오히려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상처를 안은 티파니의 모습을 아주 잘 표현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기가 떠안고 있는 문제도 많지만, 그 현실을 똑바로 보고, 자기가 느낀 사랑에 대해서, 행동으로 옮기며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티파니의 모습은 그래서 참 아름답게 보였다. 자기의 사랑에 대해 적극적인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를 보게 된다.

 

팻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는 대사에 이 영화가 말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군가 너에게 손을 내밀려고 할 때 그 마음을 알아채는 게 중요하다. 너에게 내민 그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건 죄악이고,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너는 지금 이 순간에 네게 찾아오는 인생의 큰 변화와 마주해야 해! ...... 분명히 말하는데 망치지 마라!"

사랑 앞에 비겁하게 피하려 들고, 게으름으로 주저앉는 사람에게, 사랑은 영원히 현실이 아닌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Silver Linings Playbook

감독: 데이비드 O. 러셀(David O. Russell)

 

* 영화 '윈터스 본(Winter's Bone)'에서 제니퍼 로렌스를 처음 봤을 때, 정말 멋지고 굉장한 배우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그가 영화 안에서 내뿜는 기운이 엄청나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말이다. 게다가 후반부에 춤 경연대회에서 춤을 추는 그 모습,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 팻에게는 끔찍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지만, 참 달콤하고 아름다운 노래인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My Cherie Amor'가 영화에 몇 차례 나온다. 자신의 삶에 가장 행복한 순간에 들었던 노래가, 가장 끔찍한 순간에 흘러나온다면? 미칠만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