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냉전 대립의 상징물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기 5년 전인 1984년의 동독, 비밀경찰인 비즐러(울리히 뮈헤, Ulrich Muhe)는 반정부 활동가로 용의 선상에 오른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 Sebastian Koch)과 연극배우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 Martina Gedeck)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집에 도청장치를 몰래 설치하고 그들의 24시간을 낱낱이 감시하며 단서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와중에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지켜보며 조금씩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비즐러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자기의 신념에 대해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회색의 옷을 입고, 회색빛의 도청기기를 다루며, 회색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릇되고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신념까지 더해진다는 건 참으로 무섭고도 섬뜩한 일이다.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들을 추적하여 심문하는 그의 모습에서 볼 때 그는 인간에 대한 정이라고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냉혈한이다.
그는 비밀경찰로서의 삶을 살면서 수많은 시간 동안 부지기수의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비즐러에게 사람들은 언제나 타인이었을 뿐이다. 그에게 사람들은 서로의 삶의 교차점이라고는 단 한 지점도 존재하지 않는 끝없는 평행선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던 그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지금껏 살아오며 느끼고 생각했던 자기의 삶과 사뭇 다른 그들의 삶에서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고 움직이며 자기 삶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된 것이다.
비즐러의 상관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라고. 그렇지만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지금까지의 삶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인간관계의 '따뜻함'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인간이 가지고 싶은 "따뜻함'에 대한 갈망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일 게다.
누군가를 지켜본다는 것, 바라본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접근이다. 타인을 그저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일이다. 사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인의 삶을 보게 될까? 그렇지만 자신과 자신의 삶을 건너, 타인과 타인의 삶과 교류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드물까? 때로는 자신이 스스로, 때로는 남이 그렇게 서로 '보고, 듣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비즐러의 삶을 변화하게 한 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반체제 활동을 하는 작가인 드라이만의 위험을 무릅쓴 저항정신이었을까? 권력으로 자신의 몸을 탐하려는 자에게 그 모진 치욕을 감수하면서도 연극 활동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는 크리스타의 예술혼이었을까? 비즐러를 변화하게 한 것은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변화하겠다는 처절한 반성과 새 삶에 대한 의지였을 것이다.
순진한 아이가 말하는 비밀경찰에 대한 험담을 들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아이와 아이 아버지의 이름을 묻는 자신. 평생을 자신의 일이 옳은 것이며, 정말 중요한 것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그가, 자신이 감시하고 잡아들여야 할 대상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가 곤경에 처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그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던 것도 그런 구태를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생각된다. 이제껏 대상화된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고, 삶의 행복을 빼앗던 그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변화하게 된 거다.
영화는 기술적인 측면의 기교는 의도적으로 제거했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도 비즐러의 표정으로 생각과 느낌들을 표출해내고, 내용의 후반부를 지나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전개의 무게에 힘을 한껏 실었기에 영화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일찍 사그라지지 않고 유지된다. 비즐러의 역할을 맡은 배우 울리히 뮈헤의 연기가 무척 인상적이다. 그는 냉기가 흐르는 차가움과 반면 어눌해 보이기까지 하는 감정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한 편의 영화로 만난 그가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질 만큼.
'이 책을 HGW XX/7에게 바칩니다.'
"선물하실 건가요?"라고 점원이 비즐러에게 묻는다. "아니요, 내가 볼 거에요."라고 비즐러가 대답한다. 야트막하게 그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그 장면에서 뭔가 목구멍으로 뜨거운 게 꿀꺽하고 넘어간다. 씹지 않은 감자 한 덩이만 한 감동. 그건 아마도 누군가의 마음으로부터 내 마음으로 전해지는, 타인의 삶이 나의 삶과 교감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벅찬 느낌일 것이다.
Das Leben der Anderen, The Lives of Others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Florian Henckel von Donnersmarck)
* 2007년 이후 6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본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우리나라 국정원 요원의 한심한 임무가 문득 떠오른다. 이건 뭐 인터넷 사이트에서 댓글로 아르바이트하는 국가정보원 요원이라니! 그런 임무에 무슨 삶을 논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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