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사회의 정치인으로서 고위층 관직에서 일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스티븐(제레미 아이언스, Jeremy Irons)은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중년의 남자로서, 사회적인 명성과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그야말로 남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탄탄하게 쌓아나가는 사회적인 지위도 갖춰져 있고, 자상하고 아름다운 아내 잉그리드(미란다 리차드슨, Miranda Richardson)와 젊은 나이에 신문사 편집부 간부직에 오르며 앞날이 창창한 아들 마틴(루퍼트 그레이브스, Rupert Graves)과 귀여운 딸 샐리(젬마 클라크, Gemma Clarke)에 이르기까지 안팎으로 모두 모자람 없이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대사관의 파티 석상에서 그의 앞에 자기가 아들 마틴의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며 안나(줄리엣 비노쉬, Juliette Binoche)가 나타나는데, 안나는 스티븐에게 아주 묘한 시선을 던지며 인사를 하고, 그런 안나의 모습을 본 스티븐은 짧은 시간이지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얼마 뒤에 마틴과 함께 다시 보게 된 안나는 마치 처음 인사를 나누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고, 얼떨결에 스티븐 또한 가족들 앞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다시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에 안나는 스티븐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자기가 사는 집의 주소를 가르쳐 주며 찾아오라고 하는데, 스티븐과 안나는 그 자리에서 정사를 벌이고 만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남들의 눈을 피해서 계속 만남을 갖게 되는데, 스티븐은 아들의 여자친구인 안나에게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을 제어하지 못하고 마치 절벽 아래로 떨어지듯이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 차게 되고, 안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스티븐과 마틴 사이를 오가며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만나면서도 아주 침착하고 냉정함을 유지하며 그 위험한 줄타기 같은 시간을 이어간다.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안나를 소유하려는 스티븐과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은 채로 지금의 시간을 유지하겠다는 안나의 모습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사랑과 욕망의 파괴적이기까지 한 격정과 파국으로의 치달음이 얹혀져 있다.
스티븐과 안나가 만날 때마다 보게 되는 격렬한 정사 장면은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아주 닮았다. 특히 스티븐의 위치에서 보게 되는 그 장면들에는 온몸을 떨게 하는 근원적인 욕망과 동물적인 탐닉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마치 섹스를 통해서 안나의 모든 것을 자기 몸에 흡수시키겠다는 의지가 보일 정도의 극단적이고 치열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섹스 장면은 두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는 예술성을 담고 있어서 외설적이거나 추하게 보이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굉장한 불안감을 증폭시키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며, 그런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의 관계가 얼마만큼 위험하고 위태로운지를 표현하고 있다.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스티븐은 아들이 안나에게 청혼하고 결혼을 앞두게 되자 안나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노력해보지만, 결국 안나가 스티븐에게 관계의 지속을 원하며 다시금 손길을 내밀자, 스티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안나에게 발걸음을 향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마침내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시종일관 이어지던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의 음악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영화 또한 잔인하고 가혹한 결과를 맞이한다. 연락이 되지 않는 안나를 찾아 안나의 새로운 아파트로 향한 마틴은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으로 조심스럽게 아파트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문고리에 꽂힌 열쇠를 비틀어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서 서로의 육체를 부여잡고 쾌감에 몸을 떠는 자신의 아버지와 애인을 보게 된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크나큰 충격에 빠진 마틴은 차마 돌아서지도 못하고 뒷걸음을 치다 난간에서 떨어져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깜짝 놀란 스티븐은 알몸으로 뛰쳐 내려가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은 아들을 품에 안고 오열하는데, 안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옷을 입고 스티븐과 마틴의 뒤로 유유히 빠져나간다. 잉그리드는 죽은 아들에 대한 슬픔과 치욕을 안겨준 남편에 대한 분노로 엉망이 되고, 스티븐은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살던 곳을 떠나서 여기저기 떠돌며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상처받은 사람은 위험하다. 그들은 살아남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안나가 스티븐에게 했던 말이다. 안나는 여러 사람과의 관계에서 결국 살아남는다. 어린 시절에 친오빠의 근친상간적 관계 요구를 거절하자 자살한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진 안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과거의 그 기억을 교묘하게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중적인 생활이 지닌 부조리함과 부도덕함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면에서 불쌍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도무지 감정 이입을 할 수 없는 냉혈한 같은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모습이다.
차가운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와 달리 제레미 아이언스는 그가 처한 상황과 그를 장악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그의 얼굴 안에 섬세하게 담은 연기를 보여준다. 욕정에 들뜨고, 질투에 불타며, 쾌락에 겨워하고, 슬픔에 눈물 흘리는 그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다. 매우 이성적이고 판단력과 사리분별력이 강해 보이던 정장 차림의 그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영화 '데미지'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삶이 어떻게 파탄이 나게 되는지를, 그 욕망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고 쓸모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과연 인간의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 어둡고 차가운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받게 되는 묵직한 울림은 스티븐과 안나의 관계가 어떻게 생성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소멸했는가가 아니라, 영화의 끝 부분에 스티븐의 읊조림으로 전해 듣는 회한 가득한 이야기다.
스티븐은 마틴이 죽던 날 이후로 딱 한 번 우연히 공항에서 안나를 보게 되었는데, "그녀는 여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라는 말로 안나를 기억한다. 커다랗게 벽에 걸린 자신과 안나와 마틴이 함께 찍은 사진에서 안나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자기가 그토록 몸부림치며 소유하고 싶었고 사랑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다시 보니, 자신의 삶에 이제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 흐릿한 기억처럼 보통의 사람이었다는 독백, 남은 건 홀로 스러져가는 자신의 삶뿐이다.
Fatale, Damage
감독: 루이 말(Louis Malle)
* 마틴을 품에 안고 흐느끼는 스티븐을 본체만체 뒤로 하고 언뜻 옅은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며 자리를 피하던 안나의 모습, 마치 공포 영화에서 마주할만한 무서운 느낌이었다. 줄리엣 비노쉬에게서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전해진다.
** 잉그리드가 스티븐에게 "둘의 관계가 계속될 줄 알았어?"라고 묻자, "응!"이라고 답하던 스티븐.
사람이 판단력이 흐려지면 얼마나 멍청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 무삭제판의 디지털 영상으로 다시 보게 된 정사 장면들, 두 사람의 섹스는 에로틱하다기보다는 마치 힘겨루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고, 예전에는 몰랐는데 육체 관계를 하는 스티븐과 안나의 다른 태도가 두 사람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알몸으로 뒹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결국 감독의 연출 능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루이 말 감독이 왜 뛰어난 감독으로 인정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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