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화면, 여자(샬롯 갱스부르, Charlotte Gainsbourg)와 남자(윌렘 데포, Willem Dafoe)의 정사 장면이 아주 느릿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배경으로 헨델(Georg Friedrich Handel)의 오페라 리날도(Rinaldo)중의 아리아인 '나를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흐르며 영화는 시작된다. 화면 속의 정사 장면이 성스럽게 표현되었다기보다는 굉장히 동물적으로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장면이 혐오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굉장히 에로틱한 아름다움으로 볼 수도 있을 그런 장면이었다. 다만, 포르노 필름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실제의 정사 장면처럼 성기가 노출되기도 하고 삽입 장면이 보여서 순간 흠칫 놀랐다.
영화의 프롤로그라고 명명된 오프닝 장면부터 감상하기가 만만치가 않다. 감독의 이름을 새삼스레 떠올리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제목부터 '안티크라이스트(Antichrist)'로 지었을까를 생각하니, 영화의 시작에 헨델의 음악을 사용한 것도 무엇인가 의미를 둔 것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아는 내용이지만, 십자군 원정이 행해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 찬양의 의미를 가진 곡을 쓰다니! 감독의 속내야 어떻든 간에 이렇게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프롤로그는 둘의 정사가 최고조로 치달을 때에 서너 살쯤으로 보이는 그들의 아들이 침대에서 빠져나와 두 사람이 정사를 벌이는 방을 거쳐 창문에 섰다가 눈이 내리는 바깥으로 떨어져 죽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마감된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해서 네 개의 장(Chapter)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오페라의 그것처럼 각 장의 시작 지점에는 필기체로 'Chapter 1, 2, 3, 4'를 표시하고 각 장의 제목도 달았다. 1장은 Grief(큰 슬픔, 비탄), 2장은 Pain(아픔, 고통), 3장은 Despair(절망), 4장은 Three Beggars(세 명의 거지들)로 구성된다.
영화는 여러 상징과 은유로 표현되는데 동시에 굉장히 노골적이어서 불편함과 공포감까지 안겨주기도 한다. 여자는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상실감과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그런데 그런 반면에 남자는 꽤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잃지 않으며 여자를 치료하겠다고 직접 나서기까지 한다. 거기에서부터 영화의 근본적인 물음과 대답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적인 시각을 잘 생각해 보자. 아담과 이브를 두고 떠올려 보면, 여자는 태생 자체도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이뤄졌고, 모든 죄의 근원적 이유이지 않은가. 바로 거기에서부터 영화는 시작되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대화 중에서 그런 은유와 비유는 좀 더 구체화한다. 여자는 아들과 한 번 갔던 숲인 '에덴(Eden)'이 무섭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남자는 이성적인 태도와 더불어 자연과학적인 지식도 꽤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그렇지만, 남자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감성적인 면에는 굉장히 메말라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여자의 슬픔을 함께 떠안으려는 노력보다는 자기의 능력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만 드러내 보이는 태도를 갖고 있다. 결국, 오만한 그의 태도는 여자를 치유하기는커녕 파멸로 이르게 하고 만다.
여자를 치유하기 위해 두 사람은 에덴의 숲으로 가게 되고 점점 더 영화는 어둡고 무겁게 변해 간다. 카메라의 시선은 다양하게 변화하고, 상징적인 장면들과 몽환적인 상황의 묘사는 영화 속 인물의 혼돈 상태를 드러낸다. 새끼를 낳고 있는 사슴, 제 살을 뜯어 먹는 여우, 돌로 짓이겨도 죽지 않는 까마귀 등의 모습은 기괴함으로 분위기를 이끈다.
"혼돈이 지배하리라!"
남자는 숲 속 오두막에서 여자가 쓰던 논문에 관한 여러 자료를 보게 된다. 거기에는 억압과 고난의 수난사인 여성에 대한 피의 역사가 있었다. 마녀로 낙인 찍히며 악마로 취급당하던 그 시대의 그림을 비롯해 여자가 직접 기록한 내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활자로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분열적이고 왜곡적인 형태로 변화해갔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엇인가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여자가 두려워했던 내재된 본능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원죄에 대한 지울 수 없는 낙인같은 절망감이다. 남자가 자기를 버리고 떠날 것이라는 망상적 공포감에 휩싸인 여자는 남자에 대한 발작적인 가학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남자의 성기를 훼손하는 장면은 웬만한 하드 고어에 익숙한 나에게도 적잖이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느낀 것은 무엇이 저 여자로 하여금 저런 상태에 다다르게 했을까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이었다. 슬픔과 고통은 절망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자기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는데 과연 그게 여자만의 죄로 기원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여자는 학대를 가하던 남자를 죽음 직전으로까지 몰고 가지만 결국에는 남자를 다시 구해낸다. 그 후 다시금 혼란스러움과 제어할 수 없는 혼돈의 상태에 놓인 여자는 마침내 자기가 가진 본능의 감지점인 성기의 음핵(陰核, Clitoris)을 가위로 제거해버리는 극단의 행동을 하고 만다. 화면 가득 클로즈 업된 그 장면의 충격은 .......
남자는 결국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만다. 그리고 마치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시대의 그것처럼 여자를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을 지른다. 그다지 애통하지 않은 표정의 그는 숲에서 산딸기 열매를 따서 먹기까지 한다.
이제 영화는 에필로그에 도달했고 처음처럼 다시 헨델의 아리아 '나를 울게 하소서'가 배경에 흐르기 시작한다. 산딸기를 따 먹던 아담의 표정이 일순간 멈칫하는 순간, 산의 저 아래로부터 얼굴이 지워진 수많은 여자들이 몰려온다. 그리고 프롤로그의 그 장면, 쾌락의 정점에서 눈을 감고 본능에 몰입하던 여자는 프롤로그에서와는 달리, 아들이 창문 가에 서서 추락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제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충격적인 장면의 표현을 택하는 감독의 의도라는 면에서 영화는 엄청난 파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진 본능은 악이라는 것을 말하는 기독교에서의 신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죄의 씨앗이고 그렇기에 삶 자체는 끊임없는 죄의 사함을 위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감독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일까?
감독의 생각과 의도를 내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또한, 내가 그런 것을 모두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물을 마시고 그것이 배출되는 통로는 눈물일 수도 있고, 땀일 수도 있고, 오줌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혹은! 응? 헉!?)
종교적으로 영화를 읽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특히, 인간의 역사에서 기독교는 얼마나 배타적이고 증오적인 모습을 보여줬는가를 생각하면 비판적인 태도 또한 당연하다. 영화감독은 영화 안에서 자기의 생각과 의식을 다양하게 표현하며 나타내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다분히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감독임이 틀림없고 또한 그런 이유로 그의 '들여다봄'은 계속될 것이다.
Antichrist
감독: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 샬롯 갱스부르의 연기는 그의 정신 상태가 염려될 만큼 격정적이며 희생적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왜 그런 영화를 만들었느냐고 묻자 자기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는데, 샬롯 갱스부르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엄청난 수위의 연기를 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비단 선정적이고 충격적인 장면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에서 샬롯은 영화의 다양한 변주와 변화의 에너지 그 자체였다.
** 우리나라에 개봉된 필름은 몇 장면에 가위질을 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다른' 경로를 통해서 삭제되지 않은 영화를 다시 봤다. 참으로 몹시 불쾌하고 불편하다. 도대체 '쥐(G) 20'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마당에 아직도 영화 작품에 가위질을 해대는 작자들은 뭐하는 인간이냐? 우리들의 문화적 수준을 왜 쥐들이 관리하려고 드는 건데?
*** 생각해보면 여자는 남자를 결국 죽이진 않았다. 죽일 수 있었음에도 여자는 남자를 살려냈고, 악의 본능이라고 느꼈던 성기의 제거도 남자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향했다. 문득 그 생각이 들고 나니, 영화에서 생각할만한 것이 또 하나 생겨버렸다. 아, 피곤한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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