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는 부족한 게 없지만, 남편과 자식으로부터 얻는 공허함을 느끼며 살아가던 임나미(유호정)는 엄마가 입원해있는 병원에서 고등학교 때의 친구인 하춘화(진희경)를 만나게 되고, 암 때문에 생이 두 달 남짓 남은 춘화가 학창 시절에 함께 어울리던 '써니'의 친구들을 보고 싶다는 말에 나미가 다른 친구들을 찾아 나서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써니'는 1980년대 중후반에 고등학교를 다녔고 지금은 40대가 된 여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추억을 주된 소재로 하고 있다.
특별할 것도 없고 그동안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적잖이 다뤘던 이야기인데 구체적인 각각의 에피소드를 다루는 감독의 연출력과 포장 솜씨 그리고 그 무엇보다 배우들의 개성이 넘치는 연기력이 최대치의 조화를 이루며 빛을 발한다.
'젊음의 행진, 영 일레븐, 이종환의 디스크 쇼' 등의 방송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일단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다.
'나이키'와 '조다쉬'가 시작되던 교복 자율화 시절, 가수 나미의 '빙글빙글'과 신디 로퍼(Cyndi Lauper)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을 떠올리는 순간에 그 세대들은 25년 이상의 시간을 훌쩍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1980년대는 통장 잔액이 29만 원 밖에 없는 전 아무개가 뉴스 시간의 시보가 땡하고 울리면 나타나던 시대였고, 거리에서는 전투경찰과 시위대 간의 치열한 가두투쟁이 빚어지던 시대였지만, '써니'에서 회상하는 그 시대는 여고생들의 어쩌면 별 생각 없이 그저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만으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치기 어린 시절로 그려지고 있다.
1980년대와 2010년대를 동시에 들여다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 간극의 무게감에 다소 벅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 '써니'에서 반영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색채를 단순화하고, 이야기의 구조를 단순화함과 동시에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그 당시의 문화적 코드들을 적절히 차용하는 것.
그래서 가장 보편적인 기억들을 끄집어내지만 어떤 조금의 불편함도 들어 있지 않은 것들만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전략.
'써니'가 '소녀시대'와 맞짱을 뜨는 일들도 결국 가벼운 욕설만이 난무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으로 연출하며, 심지어 전경과 시위대 간의 가두투쟁의 현장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도 조이(Joy)의 터치 바이 터치(Touch by Touch)가 흘러나온다.
대놓고 영화 '라 붐(La Boum)'의 장면을 빌려 온 장면과 빼놓을 수 없는 경춘선 기차 여행의 장면들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그런 소재들을 박장대소하며 눈물 나게 웃을 수 있도록 재미있게 펼쳐 놓았다는 것이다.
표면에 드러낸 각각의 인물과 에피소드들이 짧은 호흡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큰 덩어리의 이야기로 빚어질 수 있던 것의 힘은 역시 감독의 연출 능력과 더불어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준 배우들의 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써니'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열 명이 넘는 배우들은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각각의 캐릭터가 분명한 자기 색깔을 지니고 있는 이유로 누가 봐도 그럴듯한 배우들을 배치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역시 빼어난 연기력을 보이는 인물은 여고생 나미 역의 심은경이다.
그야말로 대단한 연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존재감이다.
과거의 시간을 영상으로 만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되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그 시간의 어느 지점에 있는 자기의 기억을 만나는 느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지난 그때의 정서에 쉽게 공감하게 되는 그 지난날에 대한 아련한 추억.
그렇지만, 그런 과거의 추억이 지금 현재의 시간을 바꾸는 힘은 없다.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현재를 기반으로 한 에피소드와 결말은 동화적인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이야기들은 일곱 명의 소녀들이 지닌 그 어떤 처지와 조건에도 제약 없이 어우러질 수 있었지만, 현재진행형의 삶 이야기로 들여다보자면 결국 각자가 처한 계급 계층적인 이질감이 그리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미흡한 단점이 엄연히 있음에도 영화는 2011년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주는 알싸한 느낌의 즐거움과 재미를 안겨주는 대중적인 영화라는 점에서 일정한 성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극장 안에서의 2시간보다 바깥에서의 몇 날을 그때 그 시절과 친구들을 떠올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영화를 본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 먼지가 쌓인 사진 앨범과 작은 추억의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들의 일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의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으며 지금 또한 소중한 시간임을 확인하지 않았을까?
과거의 시간은 꿈처럼 지나갔지만, 지금 현재의 삶도 언젠가는 꿈같은 시간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Sunny
감독: 강형철
* 극장에서 그렇게 박장대소하며 웃었던 기억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나미와 수지의 포장마차 장면은 생각할수록 웃음이 난다. 크큭..
** 극 중의 춘화는 1968년 9월 7일생인가로 기억된다.
강형철 감독이 몇 년생인지 모르겠는데, 그 세대인가 궁금하다.
하지만, 칠공주가 없던 학교가 훨씬 많았고, 정치사회적인 고민을 0.1g도 하지 않지는 않았다.
*** 언젠가 누군가 '써니'와 다른 '무니(moony)'의 감성으로 그 시절을 다루는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의정에 싸인 톡톡 튀는 맛이 아닌 조금 쌉쌀하더라도 진득한 맛이 있는 그런 영화를......
'영화。kⓘ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티크라이스트: 상징과 은유 혹은 극단적 직설로 들여다보는 인간 본성의 심연 (0) | 2011.06.21 |
---|---|
악인: 외로움, 어떤 이에겐 죽음보다 무겁고 무서운 것 (0) | 2011.06.18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여자의 일생 (0) | 2011.06.07 |
인사이드 잡: 탐욕의 체제, 악마같은 권력층. 극복하거나, 수탈당하거나! (0) | 2011.05.28 |
바벨: 인종과 계급을 가로지르는 단절과 괴리, 그 막막한 슬픔 (0) | 2011.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