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한 살 때 동네에 개병이 돌았다.
병에 걸린 개는 제일 먼저 제 어미를 물었고 이후 아가리로 물 수 있는 건 모조리 물어 죽였다.
며칠 뒤 삐쩍 마른 꼴로 나타난 그 개는 천천히 드러누워 죽었고 개를 묻어줬다.
어른들은 그날 밤 묻힌 개를 꺼내 잡아먹었다.
다시 개병이 돌고 있다."
2010년 마지막 날에 본 후에 한참동안 영화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주저했다. 영화의 서두에 나레이션으로 이야기한 내용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다른 것은 이 영화가 그렇게 복잡다단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지극히 단순한 영화의 화법을 굳이 무거운 의미의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황해는 인간이 가진 삶의 욕망과 그것을 차단하고 피폐화하는 세상의 폭력적인 구조에 관한 영화다. 나는 그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의감이나 소신, 양심, 관용 따위의 것들에서 먼 존재들이다. 그저 치열하고 처절한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와 욕망만을 따르는 모습으로 비친다. 관념적인 수사가 횡행하는 인간의 모습 이면에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분명히 기반을 두고 있다. 어둡고 추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흙먼지 날리는 혹은 흙먼지가 뒤섞인 땅과 바다로 그려진다.
돈을 벌어오겠다고 한국으로 향한 구남(하정우)의 아내(탁성은)는 소식이 없어진 지 오래다. 아내를 한국에 보내는 과정에 들어간 돈을 빚진 구남은 택시 운전을 하며 돈을 벌지만, 그걸로는 빚을 갚기에 한참 모자란다. 그러던 중 마작판에서 만난 면가(김윤석)로부터 한국에 가서 사람을 죽이고 엄지를 가져오면 빚을 청산해주겠다는 제의를 받는다. 그렇게 시작된 구남의 출발점으로부터 사건은 꼬리를 물고 엉키고 섥히며 구남은 살아남기 위해 끔찍한 도망의 길을 가게 된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에 사는 유도선수 출신의 체대 교수 김승현(곽병규)은 공개된 직함과 달리 룸살롱과 안마 시술소를 운영하는 건달과도 같은 인물이고, 그에게는 그를 죽이고자 하는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표면적으로 버스 회사 사장이지만 조폭 두목인 김태원(조성하)이고, 다른 하나는 김승현의 부인(임예원)의 정부인 은행원 김정환(박병은)인데, 두 사람이 가진 살인의 이유가 되는 것은 모두 치정과 관련한 것이다. 김태원은 자기의 정부(이엘)과 놀아난 것에 대한 복수이고 김정환은 김승현의 아내를 얻기 위함인 것이다. 그야말로 살인을 청부하는 이유 자체가 알고 보면 굉장히 원초적임을 새삼 일깨우는 대목이다.
신호준수, 빨간 불, 충돌 그 와중에도 도망가야 하는 삶.
그 뒤로부터 영화는 감독의 전작인 '추격자'처럼 쫓고 쫓기는 숨 가쁜 시간이 이어지고, 찌르고, 두들겨 패는 유혈 낭자 극이 된다. 하지만, 황해는 급박하게 짜여진 서스펜스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전작보다 규모와 판은 훨씬 커졌지만, 상대적으로 인물에 대한 집중도는 작아진 탓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영화는 모든 사건과 인물이 뒤엉키는 카오스적인 상태로 치닫는다. 영화 속의 인물들도 자기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관객이 그걸 알 수 있겠나.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죽어나가는 사람은 늘어나고, 구남의 탈출기 혹은 생존기에 감정을 고스란히 개입하게 된다. 앞이 잘 보이지 않게 휘몰아치는 황사가 뒤덮인 황해의 풍경일 것 같은 지독하게 깜깜하고 갑갑한 느낌과 함께.
행복호라는 걸맞지 않은 이름의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넌 구남은 희망여인숙에 묵지만, 희망의 이끼 따위도 끼어들 틈이 없는 삶이다. 거칠고 황폐하며 끔찍하리만큼 극사실적인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세세한 장면들을 보며 느끼게 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비관적
태도와 도무지 이놈의 처절한 난투극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암울한 궁금함 등이다. 화면과 화면의 컷이 어찌나 짧고 많은지 극장에 앉은 채로 스크린에서 함께 뛰는 것 같다. 그만큼 속도감과 힘을 가진 영화이면서도 그 묵직한 에너지를 영화의 끝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이어간다. 그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감독 스스로 정제하고 여과한 시나리오에 대한 자기 이해력의 힘과 실제 영화로 옮기면서 덧붙여지는 농밀한 직조의 연출력에서 기인한 것일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물론, 등장인물들의 얽힌 사슬의 구조를 지나치게 꼬아 놓다 보니 영화의 묵직한 흐름을 쫓아가면서 계속 앞 장면에 생각이 머물게 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영화가 가지는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인물 모두에게 관계되는 나름의 이유와 원인을 세세하게 부여해서 짜다 보니까 피곤함을 주기도 한다. 구남과 면가, 그들과 연계된 김태원에 집중했더라면 오히려 더 진중한 내용을 얻지 않았을까. 특히 그렇게 오만 가지 지뢰밭 같은 시간을 지난 구남의 최후는 조금 허탈했다. 감독이 오히려 그런 허무함으로 마감하려 했다면 이해는 가지만 말이다.
구남의 처절한 발버둥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악의 화신과도 같은 면가를 제외한 김승현과 김태원과 김정환 그리고 그들의 여자들과 구남의 아내. 세상에 믿을 연놈 하나 없다는 고립감을 느끼며 구남은 결국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접는다. 포스터의 문구에 이런 말이 나온다. "놈의 제안을 수락한 순간, 모든 것이 꼬여버렸다!" 우리의 삶에 그런 악마의 유혹 같은 제안을 하는 것은 누구이며,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黃海
감독: 나홍진
* 등장하는 분량만을 놓고 보자면 김윤석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그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는 무게감은 그야말로 거대한 포스였다. 또한, 조성하가 보여준 절제된 듯하면서도 서늘함이 배인 연기력도 대단했다. 하정우가 쫓기는 과정, 산 중턱 어디쯤에서 고통과 절망에 휩싸인 채로 서럽게 우는 장면에서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보면서 영화가 가지는 '리얼리티(Reality)'에 관한 몇몇 논쟁을 접했다. 그런데 영화의 극적 리얼리티라는 것에 대한 오해를 가진 사람들이 좀 있었다. 영화가 가지는 사실성이라는 것은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투영이다. 그런데 뭐 저렇게 총 맞고 칼에 찔렸는데 어떻게 그리 뛰어다닐 수 있느냐, 뭔 구남이가 그리 싸움을 잘하느냐 등의 문제가 영화적 사실성을 말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사실성과 극 영화의 사실성을 혼동하면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는 건지 원..
*** 감독이 의도한 것이 분명하겠지만, 구남이 황해를 건너면서 탔던 배 이름이 '행복'이었다. 그리고 구남이 한국에 도착해서 머물렀던 여인숙의 이름은 '희망'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그 배의 이름이 궁금해서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 추격자나 황해나 모두 굉장히 남성적 영화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구남의 꿈 장면이라든가 김태원과 정부의 정사 장면은 꼭 그런 식으로 찍어야 했을까? 특히 김태원 정부의 벌거벗은 모습을 꽤 장시간 노출하는 것은 혹시 상업적 측면에서의 외부적 압력이었을까? 나홍진처럼 장면의 구조에 완벽주의자(!)적인 노력을 보여주는 감독이 그런 식으로 찍은 이유를 모르겠다.
***** 황해라는 이름 말이다. 그 어떤 나홍진 감독의 인터뷰를 봐도 묻는 이도 없고 스스로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왜 황해인가. 그 단어가 주는 공감각적인 이미지 때문일까? 동해가 일본해가 아니듯이 황해는 서해가 아닌가? 내가 지금 가진 생각이 너무 협소한 시각인 건가? 흠..
****** 영화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99-1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 지도를 통해 주소를 입력하고 실제로 찍은 '로드 뷰(Road View)'를 봤더니, 어헉!! 영화에 나온 그곳이다!! 어허.. 이햐.. 우와.. 흐음.. 거기에 한번 가봐야 하나?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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