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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 오브 소로우 - 슬픈 모유: 참혹한 삶의 고통을 딛고 희망의 꽃을 피워라

evol 2013. 9. 25. 21:27

 

 

(*주의! 스포일러가 있음!)

 

얼굴 가득 세월의 흔적이 담긴 주름, 그 주름마다 슬픔과 허망감이 들어찬 어느 노파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노래를 한다. 노랫말은 끔찍하게 몸서리쳐지는 자신이 겪은 과거의 기억이다. 그리고 노파는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다독거리며 지켜보는 파우스타(마갈리 솔리에르, Magaly Solier)의 어머니다. 파우스타의 엄마는 딸 앞에서 이내 조용히 숨을 거둔다.

 

페루의 수도인 리마 외곽의 마을에 사는 파우스타는 이른바 '슬픈 모유병'이라고 불리는 증세를 심하게 보이고 있다. 페루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슬픈 모유병이란 여성이 임신한 상태에서 강간과 성폭행 등의 학대를 당하게 되면, 태아에게 엄마의 공포감이 모유를 통해 전해지고, 그 젖을 먹고 자란 아이는 그러한 성적 공포를 물려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영혼마저 사라진 그 아이는 자라서 성인이 되어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는데, 파우스타 또한 그렇게 슬픈 모유병으로 심신이 몹시 아픈 삶을 산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페루는 내전으로 말미암아 수만 명이 죽을 정도의 극심한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을 겪는다. 혼란의 와중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바로 힘없고 약한 여성들이다. 파우스타는 그렇게 사회의 참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어머니가 겪은 성폭행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고, 성인으로 자라서도 그 두려움의 방비책으로 질 속에 감자를 넣고 다니는 어이없는 삶을 산다. 남자를 극도로 두려워해서 기피하고, 혼자서 길을 걷게라도 되면 벽에 바짝 붙어 고개를 숙이고 달려간다.

 

그러던 와중에 파우스타는 감자로부터 감염증세를 보이며 자주 코피를 쏟고 기절하기에 이른다. 의사는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하지만, 두려움의 망상과 잘못된 믿음 때문에 거부한다. 제 몸이 아픈 것도 상관없이 파우스타는 오직 엄마의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지만, 가난한 삼촌 집에서 함께 사는 형편상으로 그렇게 하기란 무리다. 게다가 삼촌은 딸의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마음은 있어도 도울 힘이 없다. 고민 끝에 파우스타는 용기를 내어 가정부로 일하기로 마음을 먹고 일을 시작한다.

 

 

 

치마를 입어도 항상 속에 긴 바지를 말아 입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꽁꽁 싸매고 웅크린 채로 지내던 파우스타는 혼자 있을 때 자기가 불러서 만든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피아니스트인 집주인의 관심을 산다. 그리고 노래를 한 번씩 할 때마다 끊어진 자기 목걸이에 있던 진주를 하나씩 주기로 한다. 돈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 파우스타는 노래를 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더불어 집으로 찾아오는 정원사에게도 점차 경계심을 푼다. 영화는 그렇게 파우스타를 뒤따라가며 한 여성을 통해 사회의 황량한 현실을 아울러 담는다.

 

영화에는 크게 대비되는 모습들이 비유적으로 나온다. 한쪽에는 서글프고 외로운 죽음과 치르지 못한 장례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흥겹고 즐거운 결혼식이 있다. 그리고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보이지 않는 민둥산에 자리 잡은 빈민촌과 넓고 화려한 부잣집이 교차한다. 그 사이를 오가던 파우스타는 자기의 고통으로 빚어낸 진주 알을 손에 움켜쥐고 다시금 '슬픈 모유병'으로 쓰러지지만, 마침내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던 두려움의 덩어리인 감자를 자신에게서 없애달라고 절규하며 흐느낀다.

 

드디어 파우스타는 엄마의 시신과 함께 엄마의 고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멈춰 바다가 보이는 해변 언덕으로 엄마와 함께 걸어간다. 어쩌면 평생 황량한 산자락 마을을 벗어나지 못했을 엄마에게 푸른 바다의 바람을 쐬게 해주고 싶었나 보다. 파우스타를 고통으로 몰아넣던 감자가 싹을 틔우고 꽃으로 피어난 화분이 파우스타의 손에 전해진다. 고통을 극복한 희망의 꽃이 거기에 있다. 

 

 

 

감독: 클라우디아 로사(Claudia Llosa)

 

* 배우 자체의 이미지가 주는 힘이 영화를 채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파우스타 역의 마갈리 솔리에르가 그렇다. 어찌 보면 어려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성숙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과 흔들리는 듯하면서도 강인함이 보이는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 전쟁으로 입은 끔찍한 상처를 떠안았다는 페루 여성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일본군에 의해 강제 위안부로 끌려간 정신대 할머니들 생각이 떠올라서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