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kⓘnⓞ。

시: 고통으로 빚어낸 처염한 진혼곡

evol 2010. 7. 10. 05:23
(2010/한국)
장르
드라마
감독
영화 줄거리

세상을 향한 그녀의 작은 외침 '시'.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의 어느 작은 도시, 낡은 아파트에서 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미자.

그녀는 꽃 장식 모자부터 화사한 의상까지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엉뚱한 캐릭터다.

미자는 어느 날 동네 문화원에서 우연히 '시' 강좌를 수강하게 되며 난생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다.

시상을 찾기 위해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미자.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것들이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아 소녀처럼 설레인다.

그러나, 그녀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찾아오면서 세상이 자신의 생각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나의 평가
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

 

검푸른 강물이 흐른다.
강물에 떠내려오는 무언가가 보인(示)다.
그것은 시(屍)다.

소름이 돋는 물흐름 소리.

나도 모르게 얕은 호흡을 하게 만드는 도입부.

영화는 그렇게 시(始)작된다.

 

예순 여섯의 나이지만 소녀같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양미자(윤정희).

꽃을 좋아해서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그녀는 몸이 저릿저릿해서 병원에 갔다가,

강으로 투신해서 자살한 여중생 박희진의 엄마(박명신)를 만난다.
간병인으로 다니는 동네 수퍼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보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생활보호 대상자, 알츠하이머 초기 환자, 파출부 혹은 간병인으로서의 그녀의 고된 일상.

그렇지만, 미자는 삶의 아름다움을 좇는 인물이다.

꽃과 나무와 새의 모습은 그녀에게 아름다움을 담는 시의 대상이 되지만,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녀에게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

 

시를 쓰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은 좀처럼 결실을 얻지 못한다.

아름다움을 찾고 보고 담는 것이 시일진대 도무지 세상은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녀는 아름답지 못한 세상을 아프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더 이상 세상이 아름답지 못함을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때묻은 존재로서의 '사람'들과 소통하게 된다.
그녀의 시(詩)는 그제서야 쓰여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시 한 편은 아름다움을 따라다녔던 미자 자신의 결과물이자, 높은 다리 위에서 검푸른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진 한 소녀의 넋을 달래기 위함이기도 하다.
미자는 그녀가 쓴 시를 읽는 목소리만 남긴 채 스크린 속에서 사라지고, 그 목소리는 어느 틈엔가 죽은 소녀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차마 바라보기 힘든 소녀의 얼굴이 화면을 채운다.

다시 강물은 세차게 흐른다.

영상이 사라진 후 엔딩 크레딧이 오른 후까지 계속 흐른다.

미자의 삶이 흐른 뒤에도, 소녀의 넋이 흐른 뒤에도 계속 흐를 것처럼......

 

*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동안 귓가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극중 미자가 쓴, 실제로는 이창동 감독이 쓴 시의 울림에 몸이 떨린다.

영화를 보는 동안의 관객에서 현실로 돌아온 후에도 그 떨림이 이어진다.

 

** "여자애가 키도 작고, 생긴 것도 그렇고 그렇게 생겼다는데, 아니 애들이 뭘 보고 그랬는지 이해가 안가요?"라는 중년의 어느 아비의 말에 다른 아비가 되묻는다.
"키 크고 이쁘면요?"

이 촌철살인.

 

*** 아름다운 '시'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하는 장면.

거기에는 사회적 지위 혹은 제도로서의 윤리 따위가 스며들지 못한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결국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시

 

아네스의 노래


양미자 (이창동)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 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