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 어느 작은 마을의 깊은 밤, 10대 소녀 렉스(레이븐 애덤슨, Raven Adamson)는 친구 매디(케이티 코시니, Katie Coseni)를 찾아간다. 엄마 없이 살아가는 렉스는 아빠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할머니와 살고, 매디는 무관심한 엄마와 산다. 소녀들을 둘러싼 세상은 언뜻 별 탈 없이 보이지만 실상은 몹시 위험하기 짝이 없다. 같은 또래의 남자아이들은 물론이고, 학교 교사, 삼촌, 심지어 아버지로부터도 갖은 폭력에 노출되어있다. 그 누구도 어리고 약한 소녀들을 보호하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다.
렉스와 매디를 필두로 해서 일단의 소녀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남자들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고, 괴롭힘을 당한 대상에게 복수하기 위해 '폭스파이어'라는 모임을 결성한다. 그런 와중에 렉스는 남자아이들과 싸우다가 칼을 들었다는 이유로 퇴학 조치를 당하고, 그 뒤로 차를 훔친 죄목으로 교도소에 간다. 징역을 마치고 출소한 렉스는 그전보다 더 강한 의지로 모임을 꾸리고자 아예 집을 얻어서 그들만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삶을 공유하며 나름의 규칙을 갖고 공동체의 생활을 해나간다.
영화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소녀들이 조직한 '폭스파이어'라는 공동체가 남성 중심의 사회 질서와 자본과 권력 등에 맞서 싸워가는 과정, 나아가 혁명을 꿈꾸며 살아가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포자기와 절망, 순응과 복종이 아니라, 저항과 전복을 꿈꾸던 그들의 이야기는 견고하고 냉혹한 현실이 그들의 이상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도 보여준다. 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의 문제에는 소녀들 각자의 고민과 갈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와해시켰던 이유는 바로 금전적인 문제였다. 슬프게도!
영화가 바라본 1950년대의 미국 사회는 이념과 체제의 대결 구도가 선명했던 시기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치열한 대립각을 세우며 경쟁하고,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표되는 미국인들의 소망이 사회 전반에 깔리던 때였다. 영화는 소녀들이 꿈꾸며 세우려 했던 이상향이 경제적 압박이라는 환경적 조건과 더불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택할 수밖에 없었던 모험주의의 폐해로 무너지는 모습을 통해서, 당시 미국 사회에 놓여 있던 모순을 그려낸다. 그리고 또한 이상주의자로서 소녀들의 모순적인 모습도 그리고 있다.
사람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순수한 시기는 바로 영화 속의 소녀들처럼 아직 때 묻지 않은 그때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 세상의 더러운 모습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길들어가며 소위 기성세대로 불리는 나이가 되어 그때를 돌아보면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더럽게 때 묻은 세상에 패기만만하게 맞서던 소녀들의 모습,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들이 들었던 순수의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가슴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을 뜨겁게 타오르던 순수의 불꽃을 회상하게 한다.
영화가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마치 실제 소녀들의 모습을 찍은 다큐멘터리처럼 맑으면서도 여리고, 예민한 소녀들의 감수성을 잘 그려냈다는 점이다. 또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소녀들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폭스파이어의 새로운 단원을 뽑는 대목에서 흑인 소녀를 거부하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내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들 안에 있으면서도 간격을 유지하는 인물인 매디를 통해서 영화 전반을 이끄는 시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좀 더 생각의 여유를 갖게 해준다.
"뜨겁게 행동하고 간절히 추구하라!"는 말은 그야말로 폭스파이어를 대변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결국, 좌초한 그들의 이념과 실천은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삶 자체까지 무가치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는 그렇게 어떻게 살아가는 삶이 빛나는 가치를 담은 모습인가를 묻는다. 또한, 비록 타다가 꺼진다고 해도 불꽃은 타는 동안은 뜨거운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감독: 로랑 캉테(Laurent Cantet)
* 매디의 대사 중에 무엇인가 간직하려면 글로 남겨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격하게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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